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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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 관리자
  • 승인 2007.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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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남편이 물린 저녁상을 치우고 들어와 보니 남편은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강여사는 남편 얼굴 위에 얹힌 안경을 벗겨서 책꽂이에 올려놓고 이불을 끌어 올려 어깨 위까지 잘 덮어 주었다.

머리도 반백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도 지친 그림자가 역력했다. 삶이란 고달프고 그 고달픈 항해를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자 강여사는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다.

그동안 꼭 행복하게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남편과 자기는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며 함께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운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서는 광고화면이 엇갈리며 지나갔다. 강여사는 텔레비전을 끄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폴 세잔느라는 자막을 보고 그냥 화면을 지켜보았다. 광고가 끝난 화면에는 세잔느의 그림, 세계를 알리는 다큐멘터리 프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여사는 남편의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텔레비전 볼륨을 줄여놓고 혼자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세잔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알고 싶었다.

특별히 세잔느여서라기보다 강여사는 요즈음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의 생애에 대해 부쩍 관심이 기우러졌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남길 수 있었는가?

강여사가 가장관심을 갖는 부분은 무엇을 남길 수 있었는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업적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업적도 남긴 것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업적을 남긴 사람만이 무엇을 남기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강여사는 자기 자신이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생을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력을 줄 수는 없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의 가슴속에 한 조각 소중한 기억을 남길 수 있다면 자신의 생도 분명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강여사는 봇물에 그림자기 비치듯 자기가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가슴속에 소중한 기억 한 조각만을 남겨주고 싶었다. 최소한 그 정도는 갖고 싶었고, 그러고 싶은 욕망이 앞으로 남은 생애를 통한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폴 세잔느의 고향과 세잔느가 다니던 학교와 소년기 때 그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미술 선생님에 관한 얘기가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었다.

세잔느는 사업을 하던 부모 밑에서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력 때문에 화가로서의 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대학 진학은 부모님의 관유에 따라 법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2년 동안 법률 공부를 하지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화가로의 꿈을 불태운다.

세잔느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다섯 차례나 미술학교 진학에 낙방했고 20번이나 화가로의 데뷰에 실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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