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4.왕오천축국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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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오천축국전] 34.왕오천축국전의 발견
  • 김규현
  • 승인 2007.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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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오천축국전 별곡 34

“옴 마니 반메 훔”

727년 10월 쯤, 당나라의 서역 전초기지인 뚠황[敦煌]에 도착한 혜초 스님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은, 아마도 이 한마디 “옴 마니 반메 훔”이었을 것이리라. 물론 당나라 서역도호부가 있었던 쿠처[高車]에서부터 당나라 영향권이었지만, 대사막을 무사히 건너와 뚠황에 도착한 순간, 혜초는 ‘이제는 정말 살았구나’ 하는 희열에 북받쳐 무심코 진언(眞言)이 튀어 나왔을 것이다.

혜초가 천축으로 가기 전에 밀교(密敎)의 전문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지만, 인도 출신으로 혜초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가 유명한 밀교승이고 또한 혜초가 여행할 당시인 8세기 초 인도대륙은 온통 밀교에 젖어 있을 때였기에 천신만고 끝에 순례를 끝낸 감회를 그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리라.
후에, 혜초는 금강지에 이어 불공(不空)을 사사하여 그의 뒤를 잇는 ‘6대 제자’의 한 명이 되어 황제의 칙명으로 나라의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우뚝한 밀교승이 되었다. 천불동(千佛洞)에 도착한 혜초는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최종 목적지인 장안으로 출발하지 않고 여독을 풀 겸, 겨울을 그 곳에 머물면서다. 바로 어떤 불사(佛事)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바로 여행기를 저술하는 일이었는데, 물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얻은 소중한 경험을 그냥 혼자서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고 또한 여행기의 저술은 당시 천축구법승들의 일반적 풍조였기에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혜초는 지난 몇 년간 그가 다녔던 오천축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모든 자료를 토대로 정리해서, 여정(旅程) 순으로 직접 가본 나라와 가보지는 않았지만 주워들은 나라로 구분하여 초안(草案)을 잡아 나갔다.
직접 다녀온 곳은 ‘從-行-日-至’ 즉 ‘어디에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라는 시문구(始文句)를 사용하였다. 원문 하나를 예를 들어보면, “卽‘從’中天竺國南‘行’三箇餘‘月’‘至’南天竺國王所住/又‘從’南天竺國北‘行’兩‘月’‘至’西天竺國王住城….” 다시 풀이하면 “중천축에서 남쪽으로 3개월 가서 남천축국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또 남천축에서 북쪽으로 2개월 가서 서천축국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라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직접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하여는 ‘어디에, 어느 방향에, 어떠한 곳이 있다’라는 객관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르렀다(至)’라는 동사를 쓰지 않는 방법 같은, 문장의 조직력도 구사하고 또한 간간이 여수(旅愁) 어린 시구절도 첨가하여 다른 여행기의 무미건조함에서 탈피하였다.

그렇게 기본 줄거리가 완성된 초안을 종이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에다 몇 번이나 옮겨 적으면서 정서해 두었다. 그리고는 뚠황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올 때 그 중 제일 깨끗한 한 부를 말아가지고 돌아왔다. 물론 이 필사본 초안은 그 뒤 장안에서 더욱 보완되어 목판본으로 발행되었을 것이다. 그 책에서 중요한 단어는 당 혜림(慧琳)이 편찬한 일종의 사전인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100에 상중하 3권으로 나눠 85자구가 실려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년 세월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대한 유산 『왕오천축국전』을 오롯이 볼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렇지만 아마도, 혜초가 뚠황을 떠나며 누구에겐가 주고 온 필사본 두루마리 하나가 뚠황에서 돌아다니다가 비록 제목도, 저자도, 앞뒤도 없는 채였지만 기연에 의해 속칭 ‘제17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도 코쟁이 외국인에게 발견되어 바다 건너로 이주를 하게 된 기구한 신세로 말이다.

아, 뚠황이여! 천불동이여!

이미 오래 전에 모래 속에 묻혀버린 옥문관(玉門關)이 아니더라도 서역을 주름잡던 병사들의 말발굽소리가, 진귀한 물건을 가득 실은 낙타들의 방울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한 뚠황은 실크로드의 목줄기에 해당되기에 중원과 서역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흉노·토번·위구르·서하·투르크가 지배했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또한 뚠황은 중원불교의 ‘일번지’였다. 불교의 고향인 천축에서 유행하는 불교 사조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천불동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4세기였지만, 그 후 11개 왕조를 거치는 천여 년 동안 글자 그대로 ‘천불동’으로 확대되었다.

현재까지 발굴·정리된 굴만도 492개 정도이나 아직도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이 부지기수라 한다. 이 석굴들은 수행을 위한 선굴(禪窟)과 탑을 돌기 위한 탑묘굴(塔廟窟) 그리고 불공을 위한 전당굴(殿堂窟)로 나뉘는데, 수(隋)대 이전 42개가 주로 선굴, 탑묘굴인 반면 수·당 이후의 것은 주로 전당굴인 것을 보면 당시 불교의 대중화되는 과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세계 최대의 불교유적지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초에 홀연히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것일까?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다음 같은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1세기 서하(西夏)가 침입한다는 소문이 뚠황에 퍼지자 약탈을 두려워한 승려들은 토의 끝에 귀중한 물건들을 한곳에 모두 모아놓고 그 입구를 밖에서 밀봉하여 흔적을 없애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전란이 지나간 뒤 어떤 연유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 감춘 사실 자체가 역사에서 잊혀져 버렸다.

그러다가 긴 세월이 흐른 뒤 홀연히 1900년 6월 22일, 드디어 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던 그 유물들은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된다. 도교의 태청궁 도사 왕원록(王圓錄)에 의해 제16굴 갱도 북면 속칭 장경동(藏經洞) 속에서 발견된 그 유물들은 질적·양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청대 말기라, 행정력이 느슨하던 탓에 왕도사는 이 물건들을 임의로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소문이 퍼지자 당시 중앙아시아의 탐험에 열중하였던 외국의 학자와 탐험대들이 달려 왔다.

먼저 러시아의 오브르체프가,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A. Stein)이, 그 다음 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 Pelliot)가, 그 뒤로 일본의 오오다니(大谷光瑞)가 차례로 헐값에 유물들을 가져갔다. 특히 펠리오는 사이공에서 교수노릇을 하던, 한문에도 능통한 동양학자이기에 며칠 동안 틀어박혀 하나하나 조사하여 경전류 24상자, 회화·직물류 5상자를 골라 프랑스로 가져갔다. 바로 이것들이 현재 파리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오늘날의 속칭 ‘돈황학’의 주된 텍스트들이었다.

이어 귀국한 펠리오는 그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앞뒤가 잘려나간 227줄의 6천 자에 불과한 짧은 두루마리의 필사본을 주시하여, 이것이 바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이름만 전해지는 『왕오천축국전』의 절약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는 혜초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 뒤 1915년, 일본의 다카스키(高楠順次郞)는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무려 1,200여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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