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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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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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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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 상환암(上歡庵)

속리(俗離)로 드는 길이 세상일로 뒤숭숭한데 문득 바라본 하늘빛이 제법 눈 시리다. 정겹게 익어가는 들판의 알곡들, 철드는 산빛이 그 숭숭한 마음을 달래주는 듯하다. 백두에서 내리 뻗은 산기운이 한반도를 품안으며 설악과 태백을 들어올리더니 남녘땅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솟구쳐 올린 명산, 바로 속리산(俗離山 1,058m)이다. 이름 없는 산이 어디 있으랴마는 속리산은 그 이름부터 불연(佛緣) 깊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세속을 여읜 산’의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이다.

지금이야 천황봉(天皇峰)을 비롯해 상환석문(上歡石門), 문장대(文藏臺) 등 팔봉팔석문팔대(八峰八石門八臺)로 울울창창한 숲과 계곡, 기암 절벽의 절경을 말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 옛날 우러러 볼 때는 아홉 봉우리가 우뚝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구봉산을 지나던 금산사의 고승 진표(眞表) 율사 앞에 지나가던 소달구지가 멈추어 선다. 소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 주인이 그 이유를 물으니 율사는 “이 소는 겉으로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한다. 이 말에 감동한 주인은 스스로 낫을 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율사를 뒤따른다. “축생도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사람에게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라는 이유였다. 이후부터 구봉산을 속리산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법주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규모가 컸다는 복천암(福泉庵, 043-543-4774)은 속리산의 복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물론 의신 조사와 진표 율사의 법주사 창건 및 중창과 관련하여 본다면 ‘비범한 기운 서린’ 법주사가 속리산의 중심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 중기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법주사와 비로봉(毘盧峰),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등 봉우리마다 불보살님을 앉혀놓은 속리산 전체를 하나의 도량으로 본다면 복천(福泉)은 분명 도량에 없어서는 안 될 수각처럼 중요한 지점이 된다.

또한 조선 제23대 순조 대왕의 태를 묻었던 태실(胎室)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의미상 속리산의 중심으로 보아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신라 성덕왕 19년(720) 창건되었다는 복천암은 「복천사 중수보권문」 등의 기록에 의하면 창건 이후 혜공왕 12년(776) 영심(永深) 선사, 고려 태조 1년(918) 증통(證通) 국사, 예종 2년(1170) 자정 국존, 조선 세종 31년(1449) 신미 대사, 영조 11년(1735) 탁융 선사, 순조 3년(1803) 취준 선사 등과 관련된 중창과 중수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신미 대사는 세종 대왕이 법문을 청할 정도로 도가 높았으며, 세조의 스승으로 칭송받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복천암에 신미 대사와 세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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