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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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뒷모습
  • 관리자
  • 승인 2007.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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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스님.

한바탕의 악몽 같던 태풍과 폭우가 휩쓴 들녘에 늦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번 스님이 잠시 귀국을 하셨을 때 “사시사철 상하(常夏)에서 지내다 보니 계절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러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일 또한 삶을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처음 스님을 뵈었을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스산한 계절이었지요. 작은 바람결에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금방이라도 첫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11월 중순이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사업에 실패한 남편을 위해, 잦은 병치레로 핼쓱해진 아이를 위해, 무엇보다 제 자신의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님이 머물고 계시던 관음암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때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을 보는 순간 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곳이 영험이 있는 기도도량이라는 말만 듣고 찾았던 것인데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기도 전에 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이젠 살았구나’ 싶었으니 아마 제 인연이 스님께 닿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집안의 우환을 털어놓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봤을 때의 스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냉담하기까지한 스님의 차가운 미소를 보는 순간 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쓴웃음이 나오는 기억들입니다.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

저는 어리석게 그런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대체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셈이었습니다. 하긴 그 무렵에도 단순히 물질의 풍요로움을 잘 사는 것의 지표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자본에 의해 삶의 가치가 분별이 되는 속세에 머물고 있으니 물질의 풍요를 일말이라도 갈구하고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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