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박씨와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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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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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말(馬)처럼 뛰는 말(言) 생각하기

아파트 경비 주제에, 뻣뻣하긴….

미영이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결혼 칠 개월을 갓 넘긴 스물여섯의 706호 새댁의 붉은 입술 사이로 비져 나온 말〔言〕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숨을 고르면서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경주마 위에 올라탄 기수에게 출발 신호로 쏘아대는 총소리였다. 골인 지점을 통과하기까지, 오로지 전력 질주만이 전부이듯, 이윽고 나머지 두 여자는 가슴 속의 말〔馬〕들의 엉덩이에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달리는 말〔馬〕의 입술을 타넘는 거품처럼, 고인 말〔言〕들이 내뱉어졌다.

누가 아니래? …아니, 나이 먹은 양반이니까, 젊은 우리가 이해한다 치자구요 …하지만, 해도 너무하잖아요 …우리가 걷어 낸 돈으루다, 월급 받아 먹고 사는 처지면서도, 어쩜 그럴 수가 있죠 …누구는 대어먹던 우유 끊는다는 협박에, 애걸복걸 발이 부르터지도록 돌아다녀, 관리비 맞추는데 …난, 백화점 수퍼 아르바이트도 떨어졌다구요 …파출부 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러게나 말이야 …허구 헌말 경비실을 비우면서도 …맞아요, 맞아 …자장면 하나 시켜 먹을래도 그렇구, 세탁물 하나 맡기려 해도 그렇구, 우리가 괜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니잖아요? …미영 어머니, 안 그래요? …그네들 드나드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가 모르면 얼굴 익힐 일이지, 딴짓 하다가도, 딱 그때만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입구를 가로막고, 일일이 간섭을 하는 통에, 우리 동 사는 사람만 피해 보잖아요 …다른 동 경비 아저씨들은 얼마나 친절하다구요…우리만 그래요 … 열일곱 평 임대 아파트라고 깔보는 건지, 원 …잡상인 들이지 말라고 했지, 누가 …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아시죠, 왜 …중고등학생쯤 돼보이는 애들이, 비닐 봉지에 본드 흡입한 흔적하며, 짓이긴 담배 꽁초들, 게다가 소줏병까지 나동그는 그 …그 나이의 애들이 얼마나 무섭다구요, 겁이 없잖아요, 왜 …모르긴 몰라도, 입대회(입주자 대표회의) 사람들에게, 뇌물 멕이구설랑 … 그래두, 설마 …순진하시긴, 쯧쯧 …요즘같이 어려운 세상, 아파트 경비 자리에 눈독 들이는 사람, 어디 한 둘인 줄 아세요 …줄줄, 벌건 눈 해가지고 줄 섰다구요, 줄 섰어요 …하필이면, 저런 늙은이를 써가지고는, 참 ….

그들이 그러는 동안, 미영 엄마는 냉동실의 얼음을 꺼내어 냉커피를 만들고, 수박을 잘랐다. 고무줄로 동여맨 그녀의 퍼머 풀린 뒷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개구장이 아이들 뛰노는 놀이터 모래바닥 한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돌멩이와 병뚜껑을 골라내던,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는 호수가 쓰인 우편함 앞에 서서, 일일이 대조하면서 넣던, 1층 화단 구석에 고추 모종을 심고 물을 주던, 켜놓은 티비 화면에서 내비치는 빛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도록 어두운 경비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졸고 있는 한밤중의 경비 아저씨 모습을 대할 때마다, 자꾸만 자꾸만….

아버지, 저예요…별 일 없으시죠? …진지는 잘 드세요? … 괜찮아요 …그렇죠, 뭐 …계세요 …또, 전화 드릴게요 …. 부녀 사이에, 곰살가운 말 한 마디 없이, 밋밋한 안부만 확인하고 끊는, 막상 끊고 나면 무언가 빠진 듯싶어, 헛바람이 가슴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긴 해도, 늘.

에, 아빠뜨 주민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가지고 말씀을 드리는데유 …저 거시기 있잖아유 … 시방 관리사무소에서 말씀 허시는데유 … 내일 아침부텀 저녁까장 소독을 실시한다는뎁유 … 거시기, 모레는 안 하구유, 꼭 내일 아침부텀 저녁까장 한다는뎁유 … 저 거시기 있잖아유 … 급헌 볼 일이 있으시걸랑은 열쇠를 겡비실에 맡기고 나가셔야, 저 거시기, 저가 아빠뜨 문을 열고설랑, 그러니께 소독을 하거든유 …그러니께, 저 거시기, 내일은 꼭 저에게 열쇠를 맡기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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