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계를 실천하고 마음을 밝혀야 개인은 생사의 짐을 벗고 세상은 평화로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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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계를 실천하고 마음을 밝혀야 개인은 생사의 짐을 벗고 세상은 평화로와집니다."
  • 관리자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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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 탐방/부산 기장군 인적사 덕명(德明)스님

이땅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있고, 산이 많고, 그 산에는 어디에나 절과 수행자가 있다는 것이 이즈음처럼 위안이 되는 적이 없다.

"사업에 실패하고나서 택시를 몰게 되었지요. 부처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범어사로 손님을 모시는 날엔 힘이 납니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 법당에 들렀다 가기도 하고, 또 훌쩍 길을 떠나 이 산 저 산에 있는 절에 가서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택시기사 말씀에 이심전심, 동조하다 보니 어느새 범어사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범어사 일주문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 왕문을 지나는데 `보살계수림산림'이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도덕이 무너지고 있는 듯한 이즈음, `보살계'라는 단어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 범어사 전계화상이신 덕명 큰스님을 뵈러 갔는데, 스님께선 `공부가 부족해 은사스님(동산 대종사)에 대한 것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신다. 그 겸허함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스승을 흠모하는 후학의 도리를 먼저 배웠다.

동산 큰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이 각별하신 듯 싶습니다.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열여덟살 때 모친께서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할 수있고 훌륭한 사람 될 수있다."시며 절에 데려다 주셨지요. 처음 절에 온 날 크고 웅장한 도량보다도 동산 스님께 먼저 반했습니다.

그때는 스님께서 범어사 조실로서 도인스님이라는 것도 몰랐는데, 처음 뵙는 순간 환희심 이 일었지요. 인자하시면서도 알 수 없는 거룩한 위엄이 풍기는 스님의 상좌가 되겠다고 졸랐는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 때는 대처승이 사찰 종무행정을 주관하고, 선방의 비구스님들은 배급을 타먹었는데 우리 스님께서 선방 스님네들 식량 대주기도 바빠서 행자를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속가의 인연으로는 6촌 형벌 되는 영제(永濟:당시 범어사 노전스님)스님의 시봉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죽도록 일하고 밤에는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경전도 익히고 염불도 익혔지요. 그렇게 1년 남짓 소처럼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이태 후에는 은사스님께 입실(入室)하게 되었습니다.

6.25사변 때 많은 스님들께서 범어사로 피난(?)해 오시어 선방이 북적북적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무렵 행자생활을 하셨는데 특별히 힘든 일은 없으셨는지요?

"고생이야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소임자 스님들은 선량(禪糧)을 조달하느라 무진 애를 쓰셨고, 선원 대중들은 부식을 자급자족 하기 위해 채마밭을 가꾸는 등 대중운력하랴, 정진 하랴, 쉴 새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훈기가 났지요. 당대의 대선지식들이 모여 정진 잘 하시는 모습에 환희심이 절로 나서 힘든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당시 선원에는 경산스님,혜암스님, 일타스님 등 150여분의 스님들이 정진했는데, 노덕스님들은 청풍당에서 주석하시고, 40∼50대 는 법당 옆의 상지전에, 20∼30대는 서지전에서 기거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범어사는 선원뿐만 아니라 운허 스님께서 강사로 계셨던 강원도 아주 유명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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