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 척판구중(擲板救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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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성사 척판구중(擲板救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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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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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삼월 삼짇날이면 강남 갔던 제비도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다던가!

연자(燕子)는 낡은 집을 헐고 새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으로 새봄 새 살림을 시작한다던 가!

원효 스님의 새 살림은 토굴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과업은 워낙 큰 일인 만큼 일조일석에 끝날 일이 아니어서 완전 한 끝맺음이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니 유민들이 사방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고구려를 거꾸러뜨린 뒤에도 전 국토를 손아귀에 넣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거기에 당나라와의 갈등, 내지는 영 토를 놓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분쟁이 종식될 날이 없었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전선을 펼 적에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자기네가 차지하여 배달민족 에 대한 후환을 깡그리 없애려 하였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신라마저 쳐서 천 하통일을 구상했던 당나라였다.

그런데 그게 그들의 마음대로 잘 되어지지 않았다. 고구려나 백제 유민이 신라측보다 당 나라 군사에 더 적개심을 갖고 도처에서 항쟁하기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백제 영토보다 지리적으로 자국과 가까운 고구려 영토에 더 미련을 가졌다. 그 래서 고구려 영토였던 요서, 요동의 두 지역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본격적으로 통치하려 하자 신라측에서는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선동하여 당군을 몰아내도록 독려 하였다.

그래서 당군과 고구려 유민간의 전쟁은 끊일 날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원효 스님은 이런 상황을 면밀히 살펴본 뒤 산사(山寺)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사문(沙門)은 산사에서 살아야 제격이다. 이유야 어떻든 사문이 세속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자신을 위해 이익될 것이 없는 법. 원효 스님은 사문으로서의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삼장(三藏)을 주석(註釋)하다가 덮어두었던 것을 다시 계속해서 다 마쳐야 했고 그 동안 몇 사람 제자로 맞이했던 비구들을 불러모아 다시 가르쳐야 하는 등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원효 스님이다.

원효 스님이 융의(戎衣)를 벗고 누더기를 걸치고서 첫 안거지지(安倨之之)로 삼은 곳은 경상도 남단의 불광산(佛光山) 기슭이었다. 제비집처럼 옹색한 터에 초가삼간(草家三間)을 꾸리고 나니 봄이 훌쩍 지나가고 초여름이 다가왔다.

"만선(萬善)이 게 있느냐?"

"예, 스님."

만선은 원효 스님의 상좌다. 백제 정벌이 끝나던 해에 머리를 깎았으니 이제는 꽤 법랍이 두터운 그다.

"뒤주에 공양은 얼마나 되느냐?"

"예, 사흘은 먹음직합니다."

"알았다."

원효 스님은 바랑에 자루 둘, 그리고 요령과 발우 한짝을 챙겨 슬며시 산에서 내려갔다. 탁발(托鉢)을 하기 위해서다."

"스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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