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등운산 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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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등운산 고운사
  • 노승대
  • 승인 2022.09.29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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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드리 나무들 사이로 아련히 이어진 이 숲길, 언제나 그윽하고 고즈넉하다. 자연스러운 흙길, 저절로 걷고 싶어지는 길. 금상첨화다. 깊은 숲길 끝에는 고운사 큰절이 고요히 앉아 있다. 위세도 떨지 않고 소란스러움도 없다. 그래서 늘 고마운 절이다.

고운사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산’이란 의미의 등운산(騰雲山) 자락에 있다. 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해 고운사(高雲寺)로 불렸지만 신라 말기 고운 최치원(857~?)이 머물며 스님들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립한 인연으로 그의 호를 따라 고운사(孤雲寺)로 바꾸었다. 외로운 구름처럼 고운사는 의성의 산골에서 곱게 늙어왔다.

그러나 고요하고 깊은 만큼 사는 스님들의 내공도 깊어서 배우는 스님들이 모여들었고 함홍(涵弘, 1805~1878) 스님이 계실 때는 무려 500여 명이나 함께 살며 공부했다. “고운사에 와서 글 아는 체하지 말라”는 속설도 그래서 전해져 내려왔다.

고운사에서는 현판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조선시대 말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1835~1919)의 글씨도 두 점이나 있다. 그의 호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전북 완주 원암산 원등암, 석굴 나한전에는 돌로 만든 석함이 하나 있었다. 이 절에서 수행하던 해봉(海奉) 스님이 1834년(갑오년) 2월 8일 입적하며 “전라관찰사만이 이 석함을 열 수 있다”고 예언했다는 말이 전해져 왔기에 후세 관찰사들이 찾아왔으나 아무도 열 수가 없었다. 1883년 신임 전라관찰사인 김성근이 찾아와 석함에 손을 대니 석함은 저절로 열렸고 안에는 한시가 적힌 두루마리가 있었다.

원암산상일륜월(遠岩山上一輪月)
영락도성작재신(影落都城作宰身)
갑오이전해봉승(甲午以前海奉僧)
갑오이후김성근(甲午以後金聲根)

원암산 위의 둥근 달 하나
그림자 도성에 떨어져 재상의 몸 받으리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이란 스님,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네

김성근은 자신의 전생이 스님이었고 지금은 선비로서 살고 있기에 해봉의 해(海) 자와 선비 사(士) 자를 취해 해사(海士)로서 그의 호를 삼았다는 것이다.

 

고운사 초입 천년의 숲길이다. 신라 때부터 올곧게 이어져 온 역사의 길이다. 의상대사도 오고 가고 최치원도 왕래한 옛길이다. 차도도 없고 데크길도 없다.

 

길옆에 세워진 함홍 스님의 비각. 돌아간 이듬해인 1879년에 세웠다. 조선 후기에는 인연 있는 인물을 기리기 위해 비와 비각을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고불전(古佛殿)이다. 아주 작은 ‘T’자형 건물이다. 100여 년 사진에도 이 건물이 보이는데 그때는 어떤 용도였을까?

 

가운데에는 손상이 많은 옛 석불이 자연석 좌대 위에 모셔져 있다.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이 이 석불에 있었을까? 중생이나 석불이나 삶은 결국 같네.

 

왼쪽에는 철로 만든 철비가 있다. 현령 이용준 영세불망비로 1859년에 세웠다. 철비는 전국적으로 흔한 비는 아니다. 대개 돌로 만든 석비가 많다.

 

계곡을 가로질러 세운 가운루(駕雲樓). 당연히 누각 기둥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흐르는 물에 구름이 어리면 마치 구름을 탄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

 

우화루에 걸린 현판 글씨는 17살에 요절한 서예 신동 이수철(1893~1909)이 열 살 때인 1902년에 쓴 글이다. 단정한 글씨로 필력도 좋다.

 

우화루 용마루 끝의 바래기기와. 바라보며 망을 본다 해서 망와(望瓦)라 부른다. 도깨비로 보기도 하지만 호랑이처럼 입술 주위에 뻗친 수염이 있다.

 

어디로 가도 보는 사람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바라보는 호랑이 벽화. 재앙을 막기 위해 용과 호랑이벽화를 그리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 유행돼 내려왔다.

 

대웅보전을 신축하기 전 중심법당은 극락전이었다. 법당의 단청을 마치 비단 무늬처럼 빈틈없이 화려하게 하였다. 금(錦)단청이라 한다. 금강역사 벽화도 있다.

 

극락전 아래에 있는 우화루(雨花樓)는 이제 찻집으로 변신했다. 절집 누각 이름에는 우화루가 많다. 순천 송광사, 완주 화암사, 밀양 표충사가 유명하다.

 

예전의 우화루는 ‘羽化樓’였다. 도교의 우화등선(羽化登仙,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에서 온 말이다. 이 현판은 찻집 대들보에 걸려있다.

 

연수전(延壽殿)은 1744년 영조가 하사한 글씨와 불교의식구 등을 모시기 위해 처음 지었다. 왕실의 원당이었기에 유생들의 행패를 막을 수 있었다.

 

연수전은 수명이 늘기를 기원하는 전각이다. 이 건물은 1902년 고종이 60세가 된 것을 기념해 다시 지었다. 곧 황실 건물이다. 현판은 김성근이 썼다.

 

고운대암 현판도 김성근의 글씨다. 그는 전생의 인연 탓인지 전국 사찰에 많은 유묵을 남겼다. 다만 한일합방 후 자작의 작위를 받아 명예를 그르쳤다.

 

연수전 벽화는 많이 퇴색했지만 그 솜씨는 뚜렷이 남아 있다. 아마도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의 화원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여의주를 다투는 청룡과 황룡.

 

소담하게 피어오르는 연꽃과 듬직한 연잎들이 조화를 이룬 연화도 벽화.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들이 노닌다. 연꽃은 씨가 많아 자손 창성을 의미한다.

 

약사전 안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9세기 양식의 항마촉지인을 갖춘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추고 있다. 연수전과 이 불상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나한전은 지금 새로 지은 대웅보전 자리에 있던 건물이다. 자리를 옮겨 앉으며 나한전이 됐다. 화재방지를 위해 대들보에 큼직한 물고기를 그려 넣었다.

 

나한전 옆의 건물은 원래 선방이었다. 이 건물의 모퉁이 기둥이 그 연륜을 말해준다. 선조들은 옛 건물들의 목재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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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2-09-29 22: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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