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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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 노승대
  • 승인 2022.10.2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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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을 다녀왔다. 익산에 와서 미륵사지를 안 들릴 수 없으니, 백제의 대표적 석탑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이 석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이 된다.

미륵사는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의 무왕이 639년에 건립했다.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크기가 400만 평에 달한다. 특이하게 탑도 3개고 금당(법당)도 3곳인 3탑 3금당 구조로 건축됐다. 가운데 목탑은 소실됐고 동쪽의 석탑은 인멸돼 서쪽의 석탑만 남아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탑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한다고 시멘트로 덮다시피 처리했다. 2001년부터 해체복원에 들어가 2019년에 완료하고 공개했으니 근 20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미륵사지 정문에서 절터로 올라가면 연못 사이를 지나가게 된다. 부처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상징이다. 지금은 대개 다리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

 

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보물이다. 2기가 서 있다. 통일 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찰은 그대로 유지됐다. 날렵하고 세련된 솜씨가 있다.

 

익산박물관 초입에 미륵사지 동탑 석등을 복원해 놓았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절터에서 나온 유물이고 받침돌과 기둥은 재현품이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목조건축에 능한 백제 장인들은 그 방식 그대로 돌을 가공해 석탑을 세웠다. 불에 타지 않는 탑을 세운 것이다. 석탑의 시작이다.

 

서탑의 네 귀퉁이에 남아있는 석인상. 그 솜씨로 보아 석탑을 처음 세울 때 만든 것은 아니고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석탑 수호 신상으로 세웠을 것이다.

 

동쪽 석탑과 금당 사이에 남아있는 석등의 지대석. 단순하고 도톰한 연잎 모양이 백제 양식임을 말해준다. 탑이 3기 있었으니 석등도 3기가 있었다.

 

금당터의 주춧돌이 넓은 판석에 얹혀있다. 주춧돌 하나를 놓기 위해서 깊이 땅을 파고 막돌을 넣어 다진 다음 판석을 놓고 다시 주춧돌을 놓는다.

 

산라나 백제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뒤에 설법전을 두었다. 많은 스님들이 모여 법문을 듣고 공부하는 곳이니 가장 큰 건물이다. 상상으로 한번 세워본다.

 

설법전의 계단과 축대. 어디서 본 듯한 구조다. 그렇다. 바로 불국사의 기단부와 많이 닮았다. 계단 소맷돌이 사선으로 내려간 점, 축대의 면석 등이 그렇다.

 

법당구역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길이가 아득할 정도로 길다. 건축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거주했을까? 백제의 경제력은 어떠했을까?

 

국립 익산박물관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유물을 집중 전시하고 있다. 중앙 목탑 석등의 복원품. 화사석만 발굴유물이다. 지대석과 옥개석은 원장소에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막새기와들을 보면 백제시대부터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사찰이 계속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시대별 기와문양이 다 보인다.

 

조선시대의 백자 연봉을 보면 그 정성을 알 수 있다. 처마 끝의 수막새기와가 떨어지지 않게 쇠못을 박고 그 쇠못을 가리기 위해 연봉을 씌워 장식한다.

 

서탑의 중심기둥인 심초석에서 사리장치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굴됐다.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임도 밝혀졌다. 무왕의 왕비는 몇 명이었나?

 

왕궁리 오층석탑(국보)이 있는 왕궁리 유적도 미륵사지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됐지만 양식은 백제식이다.

 

5층석탑에서 나온 순금 사리함. 그 문양이 미륵사지 사리함과 같아 그 예맥이 서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안에는 목 긴 녹색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무왕이 지은 별궁으로 알려진 이 터에는 정원을 꾸미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옮겨온 석물들이 남아있다. 기묘한 모습의 돌들은 석질도 서로 다 다르다.

 

연동리 석불좌상(보물)은 최초의 입체 석불로 알려져 있다. 물론 백제 장인들이 조성한 것이다. 얼굴이 손상되어 여러 모습으로 모델을 시험 중이다.

 

동고도리 석불(보물)은 작은 시내를 마주 보고 서 있다. 물을 따라 들어오는 잡귀나 역병을 막기 위해 세운다. 이런 형식을 수구막이라고 부른다.

 

전주 시내의 거북바위. 전주 KBS방송총국 경내에 있었으나 아파트단지가 되어 없어질 위기에 있는 것을 주민들이 살려냈다. 전주의 북쪽 지킴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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