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안동 병산서원과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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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안동 병산서원과 유성룡
  • 노승대
  • 승인 2022.09.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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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수제자를 손꼽으라면 단연코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이다. 학봉 김성일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 하여 조정의 판단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다.

이때는 이미 당쟁이 시작돼 서인이었던 정사(正使) 황윤길이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 했으나 조정은 동인이었던 부사(副使)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고 당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유성룡도 동문 선배이며 같은 동인이었던 김성일에게 동조했다.

그래도 유성룡은 앞날에 대비하고자 이미 이순신과 권율 등을 천거해서 중하게 쓰도록 미리 조처했다.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7계급을 특진해 전라좌수사로 발령받은 것도 이런 연유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내내 전시조정을 이끄는 재상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서인 재상 윤두수와 함께 명나라 군대의 식량문제부터 전쟁상황의 다급한 현안들을 현명하게 해결해 나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성룡의 활약은 조선 백성들에게 큰 복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인 1598년 11월 19일. 그의 친구이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날, 유성룡도 탄핵을 당해 파직됐다. 명나라로 가는 변무사(잘못 알려진 사실을 해명하러 가는 사신)의 직무를 “8순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성룡은 전쟁이 끝나면 이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하고 개전 초기부터 고위직 관료로 일했던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서 파직을 각오했을 것이라 짐작하기도 한다.

어쨌든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온 유성룡은 죄가 풀려 벼슬이 내려졌지만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징비록』 집필에 매달렸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 등을 담았다.

유성룡은 책의 첫 장에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기록한다”고 했다. “징비(懲毖)”는 『시경』의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에서 가져온 말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유성룡 사후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풍악서당에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모신 후 향사를 모셔 오다가 서원으로 승격됐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지켜져 내려왔다. 201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 9곳 서원의 하나로 서원이 앉은 자리와 주위 경관이 뛰어나 그를 기리는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이 병산서원에는 유성룡과 그의 제자이자 셋째 아들인 수암 유진(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동쪽, 화산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은 낙동강의 티 없는 모래밭과 그 강 건너 병풍을 펴 놓은 듯한 병산(屛山)을 마주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은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로 “사적인 욕심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논어』에 실려있는 말이다.

 

서원에는 대개 연못이 하나씩 있다.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와야 연못이 맑음을 유지하듯이 선비는 항상 책 읽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만대루 현판은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온 말로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마주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복례문 안쪽의 한 공간에는 타고 다니던 가마가 보존돼 있다. 가마는 신분에 따라 타는 종류가 다른데 사진에 보이는 평교자는 서원용으로 쓴 것이다.

 

동쪽 기숙사인 동직재 앞에 있는 매화나무도 서원의 품격에 맞게 연륜이 깊다. 적어도 100년은 묵은 홍매다. 서쪽 정허재 앞의 매화는 백매다.

 

병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는 입교당은 강학 공간으로 원생들이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배움터다. 입교당 앞의 무궁화도 역시 만만치 않은 나이를 자랑한다.

 

입교당(立敎堂)은 『소학』의 입교 편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착한 본성을 닦아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에서 이름을 취해 당호로 정한 것이다.

 

만대루는 7칸의 긴 누마루 건물로 사시사철 변하는 주위의 경관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으나 이제 출입이 금지돼 그 감흥을 다시 맛볼 수 없다.

 

보물로 지정된 만대루에는 북이 하나 매달려 있다. 서원에 여자, 사당패, 술이 들어오면 울리는 북이다. 행실이 그른 원생을 북을 울리며 쫓아내기도 했다.

 

유성룡과 유진을 모시고 있는 존덕사 사당의 정문. 해묵은 배롱나무는 지정보호수다. 존덕(尊德)은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이다.

 

장판각은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서원의 출판소라고 해야겠다. 목판이 훼손되지 않도록 바닥을 땅에서 띄우고 앞면도 나무 널판으로 했다.

 

전사청은 제사를 모실 때 제물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곳이다. 신성한 제물을 보관하기 위해 사방으로 담을 둘렀다. 부엌, 온돌방, 마루방 세 칸으로 구성됐다.

 

주사(廚舍)는 서원의 관리인들로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 원생들의 식사를 마련하는 사람, 유사(서원 살림 책임자)를 보조하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다.

 

 

서원 밖 주사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선비들과 화장실을 함께 쓸 수 없다. 주사 앞의 통시(화장실)는 지붕이 없다.

 

병산서원을 뒤돌아 나오며 바라본 풍경. 유성룡이 죽은 뒤 7년 후인 1614년에 존덕사를 세웠고 1863년에 철종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됐다.

 

국보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높이 17m의 벽돌탑으로 국내의 전탑 중에서 가장 크다. 특히 이러한 벽돌탑은 안동지역에 여러 점이 남아 있다.

 

기단의 네 면에는 화강암에 조각된 사천왕상과 8부신장상을 배치했는데 남쪽 면에 설치된 계단은 1층 몸돌의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로 향했다.

 

안동지역에는 벽돌탑과 함께 특이한 석탑이 하나 더 있다. 막돌을 정사각형으로 5단을 쌓아 올린 방단형적석탑이다. 의성에도 이런 적석탑이 1기 더 있다.

 

꽃대가 올라오는 상사화가 적석탑 옆에 무리 지어 피었다. 우리의 전통 상사화다. 꽃이 작고 붉은 것은 정확하게 꽃무릇(석산)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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