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품은 지리산] 인터뷰_도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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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품은 지리산] 인터뷰_도법 스님
  • 최호승
  • 승인 2022.01.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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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싹 틔운 산이 바로 꿈 깨는 삶의 무대
지리산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

한 가지 장면이면 충분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어느 음식점이었다. 집필한 책을 알리던 자리에서 밥을 먹는 순간이었다. 밥풀이 떨어졌다. 숟가락이나 밥그릇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밥풀을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채신머리없다고 핀잔 주는 눈길은 없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도법 스님이다. ‘생명평화’라는 가치를 한국 사회에 알린 스님은 밥풀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쌀 한 톨 밥알 하나에 담긴 의미와 감사가 몸에 습관처럼 배었다. 오래됐다는 증거, 그거면 스님의 가치관과 인생이 온전히 드러났다.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무대는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이었다. 

사회의 아픔 그 현장을 오갔던 도법 스님은 한번도 지리산을 떠난 적이 없다. 

 

1992년 지리산, 인연의 시작

현대판 결사운동 선우도량 창립과 활동, 조계종단 개혁,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창립, 생명평화 탁발순례, ‘붓다로 살자’ 운동, 화쟁위원회 위원장,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장…. 도법 스님을 가리키는 여러 직함과 활동 이력이다. 여기서 지리산을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은 한 번도 지리산을 떠나지 않았다. 계절이 봄으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로 또 겨울로 100번 넘게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지리산 곁에 있었다. 사회의 아픔을, 몸담은 불교계의 아픔을 모른 체할 수 없어 몇 번씩 길을 나섰지만, 돌아온 곳은 지리산이었다. 

스님은 조계종 소임을 마친 뒤, 2018년 실상사로 내려와 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출가 55년 세월 동안 품었던 화두를 글로 풀어 『붓다, 중도로 살다』를 썼다. 지리산에서 다시 1년이 흘렀다. 

“서울 일을 몇 가지 정리하고 내려와서, 해오던 일을 하고 있지. 사부대중 공동체와 마을공동체, 두 가지를 불교 또는 사회의 대안으로 완성도 있게 만들려고 늘 여기서 이렇게 살아.”

늘, 여기서, 이렇게, 산다. 그렇게 30년이다. 스님에게 지리산의 의미를 물었다. “그냥 인연이지.” 싱거웠다. 대단한 답을 기대한 전제부터 잘못이었다. 지리산이, 실상사가 삶이 돼 버린 스님에게 거창하고 화려한, 글로 쓰기 좋은 답을 바랐던 욕심이 컸다. 답은 도법 스님다웠다. 답의 맥락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스님이 강조한 중도(中道), 있는 그대로 보고자 직접 묻고 들여다볼 수밖에.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금산사로 출가한 스님은 홀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해져 죽음과 마주했다. ‘나는 무엇인가’, ‘왜 죽는가’, ‘왜 사는가’ 물음이 스님을 휘감았다. 선방에 똬리 틀고 답을 구했지만, 얻지 못했던 스님은 『화엄경』을 만났다. 우주를 큰 그물로 보는 인드라망 세계관에 눈을 떴다. 산천초목 등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된 생명평화가 움튼 것이다. 그러니까 지리산은 숙명이었다. 

“지리산 실상사에 온 게 1992년인데, 선우도량의 활동 근본 도량으로 택한 거지. 지리산이 민족의 성산이라는 인식, 선불교 사상과 정신이 최초로 시작한 도량, 기성의 틀이 약해 새로운 변화 모색이 가능한 곳. 이런 이유로 인연이 닿았어.”

맞다. 한라산을 제외한 남녘 산중에 가장 크고 깊은,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민족의 영산이 지리산이다. 실상사는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 산천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라고 하여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창건한 도량이다. 동쪽은 지리산 천왕봉, 남쪽은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싼 들판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실상사다. 특히 구산선문 최초 가람으로 선풍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 생명평화를 꽃피울 최적의 공간이었다. 

생명평화무늬는 우리 모두의 인생 화두인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 설명이다. 불교적으로는 인드라망 무늬, 조계종단은 삼보륜, 원불교는 일원상, 일반 대중은 생명평화무늬라고 한다.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연기적으로 이뤄진 존재이기에 분리독립, 고정불변한 그 무엇도 있지 않고 온통 관계와 변화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생명과 평화’에서 ‘과’ 빼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절, 다들 ‘생명과 평화’를 입에 올리곤 했다. 도법 스님은 등호를 붙이기 어려운 단어에서 ‘과’를 빼기 시작했다. 지리산 실상사 주지였던 도법 스님은 1998년 국내 최초로 ‘귀농전문학교’를 설립, 실상사 농지를 제공했다. 1999년에는 불교 대안 운동단체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 본격적으로 ‘생명평화’ 씨앗을 심어 나갔다. 

지리산과 실상사에 ‘생명평화’를 파종할 무렵, 지리산은 더 큰 과제를 제시했다. 이야기는 1998년 문정댐에서 시작한다. 지리산 용유담을 예정지로 한 다목적댐이었지만 실상사까지 수몰 범위에 들어갔다. 지리산 지역 현안에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등 종교계와 환경·지역단체들이 뜻을 모았다. 중요한 거점이던 실상사는 범국민적인 여론을 형성해냈다. 이때 생긴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과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는 ‘지리산 생명연대’로 합쳐졌다. 목표는 개발 반대가 아니었다. 지리산에 기대어 사는 주민, 생명 모두를 살리자는 것이었다. ‘어머니’ 지리산을 투쟁의 장이 아닌 화합의 장으로 만들자는 뜻이었다. 꺾이지 않은 정부의 댐 추진 계획에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는 ‘지리산댐 갈등 해결을 위한 사회적 대화’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계속 중재에 나섰다. 정부 측과 주민 대책위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양측의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9월, 20년 만에 백지화가 결정됐고 이 댐은 ‘지리산댐’으로 불렸다. 

“실상사에서 논의했어. 지속해서 잘 살려가자고 역설했고, 댐 백지화가 아닌 ‘살리기’로 뜻을 모았지. 불교 세계관과 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상징적인 활동이야. 불교 홀로 한 일은 아니지만, 불교 정신으로 시대에 맞게 해보자는 문제의식으로 함께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야. 이게 새만금으로, 삼보일배로 확장한 거지.” 

도법 스님은 ‘있는 그대로 보기[中道]’ 위해 지리산과 직접 마주했다. ‘어머니’라 불리는 지리산은 한(恨)이 많았다. 민족의 아픔을 품고 품었으니 그럴만했다. 한을 달래기로 했다. 2001년 5월, 시민·종교·환경 단체가 손잡고 ‘지리산위령제’를 봉행했다. 좌우 이념 갈등으로 지리산 자락에서 희생당한 1만여 원혼을 달래는 장이었다. 지리산에서 총칼을 겨눴던 군인과 경찰, 빨치산, 그들의 유가족, 불자 등 5,000여 명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분단 이후 처음 범종교계와 시민들이 ‘생명평화’를 화두로 한 위령제는 계기였다. 종교 간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시민운동이 종교와 손잡으면서 대립 논리를 넘어 상생 논리에 눈뜨기 시작했다.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했지. 난 그걸 이어서 천일기도를 했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젠 생명이다’라는 키워드가 가치였어. ‘생명평화’는 이상하게 취급받고 오해도 받았지. 내용은 채워가는 중이지만 진보와 보수, 이웃 종교를 망라해서 모두 쓰고 있어. 불교가 중심에 서서 일궈낸 거야.”
요즘 ‘생명평화’ 단어를 쉽게 쓴다. 지금은 생명이 곧 평화이자 평화가 곧 생명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첫걸음은 걷기였다.

생명이 곧 평화라는 생명평화 키워드는 쉽게 쓴다. 이 키워드에 몇십 년을 바친 도법 스님의 실천이 담겼다.

 

둘레길로 뻗어가는 ‘생명평화’

‘지리산위령제’에 앞서 실천 프로그램이 걷기였다. 지역, 종교, 이념의 벽을 허물고 민족 화합과 생명평화를 위한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다. 2001년 5월 3일 경남 함양 의탄분교에서 출발한 도보순례단(단장 수경 스님)은 지리산을 시계 방향으로 걸었다.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5월 18일 실상사에서 회향했고, ‘지리산위령제’로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생명평화가 대중화된 게 몇 가지 있어. 가장 성공적인 게 지리산 둘레길이야. 그 자체가 대안 운동의 시작이었어. 현대사회에서 성찰의 삶과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온몸으로 자연과 함께 걷는 게 필요했어. 종교와 시민단체와 관공서가 수차례 논의하고 만든 게 지리산 둘레길이야. 이제 길과 걷는 문화는 생활화됐지.”

도법(道法) 스님도 지리산 둘레길을 모두 걸었다. ‘움직이는 안거’도 했다. 선불교 수행 가풍에서 찾은 대안이었고, 겨울에 5명의 스님이 90일 동안 침묵으로 걷고 저녁에는 100배 절명상을 했다. “돌이켜보면 지리산이니까 가능했던 안거였다”라고 스님은 회고했다. 

그리고 스님은 유례없는 길 위에 올랐다.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지리산 1000일 기도’를 회향하고, ‘생명평화’ 화두를 풀고자 탁발순례에 나섰다. 천년 넘게 실상사를 지킨 탑들이 아침을 재촉하던 2004년 3월 1일, 스님은 붓다에게 인사 올리고 도량을 나섰다. 10년 동안 몸담은 실상사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5년 동안 2만 5,000리를 걷고 7만 5,000여 명의 사람을 만났다. 스님은 길에서 묻기로 한 것이었다. 만나는 모든 생명이 붓다이니 걷고 걸으면서 만나고 또 만났다. 스님은 곳곳에 흩어진 맑은 물이 조롱박에 담겨 있으면 무력하니, 맑은 물방울이 모여 힘찬 흐름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생명평화’의 흐름이….

이때 ‘생명평화경’을 만들었다. 세계는 인드라망의 생명공동체로 연결돼 있기에, 서로 평화와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진리를 담았다. 그 생명평화의 진리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100개 생명평화서원을 읊조리며 100번 절하는 ‘생명평화백대서원 절 명상’이 탄생했다. 

 

“꿈 깨라,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

도법 스님은 왜 늘 갈등과 아픔의 현장에 있을까? 오래된 질문이었다. 스님은 “세상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고 즉답했다. 

“몸의 중심이 어디인가? 사람들은 뇌 혹은 심장이라고 해. 그런데 실제 몸의 중심은 그때그때 아픈 곳이야. 발가락 하나를 다쳐도 사람은 그곳을 치료하려고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지. 발이 아픈데 마음이 괜찮을까? 붓다는 법을 베푸는 현장이 아픈 곳이라고 했어. 불교의 매력은 여기 있는 거야.”

스님은 붓다가, 붓다의 가르침[佛敎]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지 않다고 했다. 어렵고 고루하지 않다고 했다. 바로 이해할 수 있고 경험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배고플 땐 밥 먹으면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처럼 너무나 상식적이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게 불교라고 했다. 불교는 어렵고 고루하고 신비한 그 무엇이라는 ‘꿈’을 깨는 게 불교이자 불교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실상사에서 불교의 매력을 느낄 수 있나요?” “직접 와서 보고 듣고 이해하고 경험하고 검증해봐.” 스님은 자신감이 넘쳤다. 2박 3일 일정의 ‘꿈 깨는 인생학교’ 템플스테이에 직접 참여해 검증하고 있어서다. 

그럼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라는데, 삶의 중심은 어디에 둬야 할까? 스님은 붓다의 탄생게 중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를 강조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이다. 삶의 중심은 자신을 포함해 고통받는 모든 존재를 안락과 행복으로 이끄는 자비와 사랑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프면 다른 게 정상일 수 없어. 당연히 아픔을 해결해야지. 복잡한 이론 다 필요 없어.”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는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빼어난 보물이 가장 많은 실상사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 수철화상능가보월탑,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석등, 부도, 삼층쌍탑, 증각대사응료탑, 증각대사응료탑비, 백장암석등, 철제여래좌상…. 헤아리기 숨이 찬 절에 그 절을 닮은 도법 스님이 있다.

“참! 지리산이 특집이라고 했지? 온갖 자료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산과 직접 대면해봐. 그곳 사람들도 만나고 구석구석 살펴서 알고 이해해야지. 그게 중도(中道)야.”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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