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수첩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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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한 물건] 수첩백서
  • 해이수
  • 승인 2020.02.19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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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를 펼쳐 보일 수는 없지만 내 수첩을 펼쳐 보일 수는 있다. 내 입술을 열어 당신에게 진심을 전하기는 극히 어렵지만 수첩을 열어 전하고픈 속마음을 적을 수는 있다. 내게 수첩은 몸 밖에 꺼내놓은 뇌이자 심장이다.

수첩에는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기록한 시간의 좌표로 가득하다.

언덕에서 만난 사람과 계곡에서의 유의사항, 동굴에서 해야 할 일과 나무 아래의 약속이 꼼꼼히 적혀 있다. 그 길에서 생각한 것, 바라본 것, 나눈 얘기, 먹은 음식 등이 궤적으로 남는다. 나는 당신에게 ‘나’를 당장 보여줄 수는 없어도 수첩은 보여줄 수 있다.

내게는 이렇다 할 작가적 시그니처가 없다. 동그란 안경을 쓰지도 않았고 고급 만년필을 갖고 다니지도 않는다. 소설가라고 새긴 명함도 오랫 동안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하나를 꼽으라면 수첩을 지니는 습관이다.

작년에 EBS <세계테마기행> 미얀마 편 제작팀과 인터뷰를 했다. 나는 진행자를 뽑는 후보 네 명 중 한 명이었는데, 줄곧 제작진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일정을 보려고 수첩을 펼친 순간 저들의 탄성과 환호를 들었다. PD 와 방송 작가들은 최신 모델의 스마트폰보다 손때 묻은 육필 수첩에 더 열광했다. 유력 후보 중에는 미얀마어를 전공한 대학교수와 그 나라의 여행 가이드북을 출간한 작가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4부작 기행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낙점되었는데, 근거는 없으나 수첩 덕분이라고 믿는다.

스마트폰 없이 살 수는 있지만 수첩 없이는 살 수 없던 시기도 있다. 첫장편소설 『눈의 경전』을 쓸 당시 휴대전화를 1년 넘게 꺼두었다. 전화만 받으면 장편을 다 썼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난감하던 때였다. 웬만하면 연락도 하지 않고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매일 집필 분량을 수첩에 기록하는 게 큰 낙이었다. 전체 분량은 라인 그래프로 그려 넣고, 챕터 분량은 파이 그래프로 그려 넣고, 하루 작업량은 막대 그래프로 그려 넣었다. 하소연할 곳도 마땅히 없어서 그렇게 수첩을 벗하며 버텼다. 그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랬다.

“넌 매일 뭘 그렇게 쓰니? 누가 보면 꼭 소설가인 줄 알겠네!”

이러다 보니 1년에 수첩 두세 권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연말이 되면 다음해 수첩을 20권 정도 구입해서 가까운 이들에게 나눠주고 내가 사용할 서너 권을 챙겨둬야 마음이 편하다. 어느덧 소문이 나서 지인들이 해외여행의 기념품으로 사다주기도 하고 값비싼 제품을 선물로 건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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