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권세가의 무덤
상태바
어느 권세가의 무덤
  • 관리자
  • 승인 2007.09.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현행자의 목소리

술익는 가을이 흥건하게 고여오던 시월이었다. 괴산 지방으로 석불을 찾아나선 그날은 판유리처럼 팽팽한 하늘이 높다랗다 못해 눈썹 끝을 찔러오는 맑은 날이었다. 석불을 친견하러 가는날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교통지옥 탈출, 서울 탈출이라는 해방감 외에 맑은 공기라는 기대가 산뜻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아침 식사를 거르기가 예사인데 밤새도록 깨끗하게 씻긴 공기는 공복으로 마셔야 그 맛이 더욱 신선하고 상큼하다. 들판마다 여름을 다 이겨내고 속을 채운 알곡들이 가득가득하였다. 마치 부지런하지 않고는 창고에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고개 숙인 알곡들이 주인의 낫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정으로만 치달리던 푸른 잎새들이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떠나려는 교실처럼 상기된 얼굴로 단풍들이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대들은 진정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아무리 머나먼 길을 갈망하여 수분을 다 토해내고 바람을 불러 술취한 단풍잎에도 깨닫고 보면 모두 제자리인 것을 저토록 어수선하게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수고한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졸업 축사가 퍼져 나가는 산과 들에서는 만국기가 펄럭거리고, 개근을 축하하는 표창장이 햇살에 반짝일 때마다 요란한 박수로 낙엽이 떨어졌다.

오창 장터에 들러 먹거리를 준비했다. 석불회 남자들은 음식 솜씨가 일급이어서 돈 주고 밥 사먹는 경우는 드물다. 자동차로 또 몇 발자국 굴러 초정리에 도착했다. 몸에 좋다는 약수를 배 터지게 퍼 마시고 병마다 가득 채웠다. 뱃속도 출렁거리고 먹을 것도 출렁거리고 논밭마다 익은 곡식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하늘마저 흔들면 시린 물보라가 쏴아 쏟아질 것만같이 충만하고 복터진 날이다.

한동안은 고향물을 먹어야 먹은 것이 소화되어서 초정 약수를 길어다 먹은 적이 있었다. 고향물을 먹기 위해서 휘발유를 가득 채우고 수원지 팔당호수를 질러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