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 - 태사(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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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성사 - 태사(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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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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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연재소설] 원효성사 - 태사(太師) 글·백운 그림·한상린 신라의 군사들은 왜군이 펼친 장사진의 허리 부분을 먼저 공략하여 배를 지키는 해안선의 부대와 산에 진을 친 부대를 둘로 나누는 데 성공하였다.

신라군에 허리르 앗긴 왜병들은 서로가 고립되어 물자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처음 상륙할 때와는 달리 완전히 수세에 몰려 산성은 산성대로 지키기에 바빴고 보급기지인 해안선은 그들의 배를 지키기에 급급한 것이었다.

"산성을 철통같이 포위하여 적의 물자가 고갈할 때를 기다려 친다면 저들을 깨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오."

원효는 휘하 장졸에게 이렇게 지시하고 산성의 적을 에워쌌다.

이때, 부산포(釜山浦)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수군이 오십여 척의 배를타고 다대포(多大浦)를 건너 서서히 왜선에 육박하기 시작하였다.

왜선에 남아 있던 적들은 수륙 양면의 협공을 받게 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 날이 어두어지자 횃불로 산성의 동료부대와 연락을 취하더니 이튿날 새벽이 되자 산성에 주둔한 병력이 총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신라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는 적군에 기습을 가하니 왜적의 사상자는 부지기수였다.

"달아나는 왜적을 더는 추격하지 말라."

일만 명의 적군은 반수 이상을 잃은 채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신라의 수군에 의해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고 본국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원효는 금관성으로 개선하여 휘하장졸을 포상하고 며칠을 쉬었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전장에서의 한가한 시간은 황금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언효는 이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과 허왕후릉(許王后陵)을 돌아보고 성에서 가까운 절들을 참배하였다.

특히 허왕후가 모국인 중천축국(中天竺國)에서 싣고온 석탑을 모신 왕후사(王后寺)에 들러서는 감회가 깊었다.

불법을 전도하기 위해 수륙만리를 건너온 그 신념과 정성이라든지, 석탑을 모시고 오매 풍랑이 가라앉아 무사히 올 수 있었다는 것에 깊이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이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가다가 도중에서 돌아오게 되었던 일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성에서 가까운 장유사(長遊寺)는 허왕후의 오라비인 보옥 조사(寶玉祖師)가 머문 가람이다. 장유(長遊)하신 것을 일컬음이며, 보옥 조사의 별호로 쓰던 말이다.

원효는 백제와의 싸움이 끝나면 보옥 조사가 생질인 일곱 왕자를 성불시켰다는 지리산(智異山) 칠불암(七佛庵)에 참배할 것을 맘 속으로 다짐하였다.

이렇게 여러 곳을 두루 돌아보고 성에 돌아온 원호는 그날 밤은 영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승의 기분에 들뜬 병졸이나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잠든 자야반은 더 없이 적요하기만 하였다. 원효는 뜨락으로 나와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우러러 본다.

서북 하늘에는 아직도 검은 기운이 자욱한 것으로 보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상감과 유신 장군의 별이 찬연한 광채를 발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군의 입장이유리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다시 동녘의 왜국을 살펴본다. 왜국은 지금쯤 전의를 상실한 채 저희들끼리 서로 책임을 돌리느라 갈등이 쉬지 않은 듯 천기(天氣)도 어둡고 산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왜국은 이제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확신한다.

다시 탐라국이 있는 남서쪽의 천기를 살펴본다. 탐라국은 원채 작은 나라인 만큼 크게 우려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고 잇는 나라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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