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 정 . 혜 삼학(삼학)으로 밝히는 ‘비구니 정혜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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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정 . 혜 삼학(삼학)으로 밝히는 ‘비구니 정혜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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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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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20주년 기념 연속 대담

대담자: 계수 스님/정혜도량 회장, 혜조 스님/이문동 관음사

계혁불사의 와중에서 그 동안 긴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비구니 스님들이 개혁에 있어서 비구니 스님들의 권리와 역할에 대한 목소리의 단일창구이자 수행길의 도반 모임인 정혜도량을 만드셨다. 이번 호에는 30년 가까이 제방선원으로 돌아다니시며 수행만 하시다 이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으신 계수(桂修) 스님과 가장 활동적인 비구니 스님으로 꼽히는 혜조스님을 모시고 정혜도량과 대표이신 계수 스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고 산적해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문제들을 들어보았다.

혜조스님 : 불교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요즘처럼 무성하게 일어난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또 무성한 말로만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앞날을 진실로 고민하는 사부대중의 실천을 함께 모아야 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중요한 주체로서 비구니 스님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되는 시기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비구니 정혜도량을 결성하시고 그 회장에 추대되신 계수(桂修) 스님을 모시고 월간『불광』창간20주년 기념 대담을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스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 것같아서 독자 여러분께 스님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스님 신상에대해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스님 세수와 법랍은 얼마나 되셨는지요?

계수스님: 나이는 쉰 살이고 법랍은 삼십삼 년입니다.

혜조스님: 법랍이 삼십삼 년이면 정말 굉장한 것인데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스님의 출가 당시에는사회적인 인식이나 현실적인 수행과정들을 고려해 볼 때 요즘보다도 훨씬 출가를 결심하기가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스님의 출가담을 좀 들려주시죠.

계수스님: 출가담이라 하면은 글쎄 뭐가있나. 저는 아주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산이 깊고 물이 맑은곳에서 태어났죠. 어려서 거기서 자라면서 저는 처음에 교회를 다녔어요. 교회를 다니면서 항상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저 산 꼭대기에다가 집을 짓고 천사처럼 살리라 했지요.

그러다 나이가 열일곱이었을 때였어요. 그곳은 시골이라 학교가 중학교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함께, 원광대학교를 다니다 오셨다는 지금의 제 스승이신, 법능 스님하고 청하 스님께 말하자면 한문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한문을 배우러 가서 그 스님네들을 보고나니까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과는 다른 깨끗한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혼자 생각에 ‘아,바로 이런 스님네들을 보고 천사라고 하는가 보다!'하고 느꼈죠.

그래 이게 큰 동기였다기보다 전생의 습(濕)이었는지 모르지만 교회를 다니면서도 스님을 천사 같이 생각했던 것이 동기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다른 동기보다도 깨끗하게 살겠다, 천사 같이 살겠다는 생각에, 저는 크게 발심한 것은 아니지만 절에 들어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도 물론 그렇겠지만 그때는 출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제가 누구처럼 도망을 나왔으면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만 도망을 나오지않고 너무 엄하게 자랐기 때문에 허락을 받고 나오는 방법외엔 몰랐습니다.

허락을 받기 위해서 열일곱 살에 동네에서 가까운 관음사에 가서 거진 일 년을 있다가 열 여덟 살에 도봉산 원효사, 나중에 제 삭발본사가 되었습니다만,거기와서 몇달을 있으면서 꼭 스님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가 한 칠월달쯤 되었는데 집에 내려 가서부터는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한숨만 쉬면서 잠도 자자 않고 어머니를 괴롭혀 드렸습니다. 칠월달에 시작한 것이 정월달까지 계속되면서,절에 가면 고생한다는 걸 알고 그 해 겨울에는 내복을 입지않고 내내 떨면서 지냈습니다. 저는 지금도 오뉴월에도 덜덜 떠는데 미리 몸을 적응시켜 보자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비장하게 어머님을 괴롭히고 있으니까 정월 초사흘날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하루종일 안 보이셨어요. 제가 죽게 되었다고 무당이나 만신들을 찾아 갔던가봐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어른들은 무당이나 만신을 굉장히 믿었잖아요? 어머니께서 찾아가 물으니, 그분들이 말하기를 "당신 딸은 원래 산신님의 딸이니 산으로 보내지 않으면 딸을 하나 잃습니다."그랬던가봐요.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에 우리 면소재지에서 묻고 다니다가 성이 차지 않아 다른 면에 까지 가서 물으셨지만 같은 얘기만 듣고 돌아 오셨어요. 그때 저를 가졌을 때 태몽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커다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어흥'하는데 그 입 속에서 서기가 우리 집을 덮쳤던 생각이 났던 거죠. 그러고는 그 점쟁이들의 말과 태몽이 일치한다고 판단하셨던가 봐요. 그래서 보내 주셨던 겁니다.

그렇게 절에 와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는데,인과라는 게 틀림이 없어요. 저희 조부모님이 그렇게 완고한 분이셨는데 절에 와서 보니 우리 노스님이 꼭 그런 분이셨어요. 지금 행자들에게 그런 중노릇하라고 하면은 아마 아무도 못할 겁니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면 저녁 아홉시까지 앉는건 고사하고 걷지도 못했어요. 항상 뛰어 다녔어요. 그래서 엉덩이를 땅에다 붙이기만하면 금방 졸기 시작하는 거예요. 변소 가서도 앉아서 졸다가 앞으로 고꾸라 지는지도 몰랐죠. 시집살이가 그렇게 심했어요. 또 일을 할줄 모르고 하니까 겨울엔 손이 손톱만 남겨두고 팔뚝까지 더덕보다 더 텄어요. 쉰다는 것이 저녁 먹고 그 산꼭대기에서 짐 지러 내려오는 것이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양식이 떨어지면 다 탁발을 다녔습니다.

스무살에 운문사 강원에 갔는데 강원에서 인과를 배우고 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산을 보고 절을 하고, 물을 보고 절을 하고, 하늘을 보고 절을 하면서 내 어린 나이에 어떻게 불법을 모르면서도 스님이 되었는지 제 자신이 너무 장하고 고맙더라고요. 저는 이 때 강원에서 재발심을 해서 여태껏 살아 온 것입니다.

혜조스님: 예, 그러면 그때부터 선방에 바로 가 계셨나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지난 30여 년 간 제방선원을 전전하시면서 오로지 수행의 한길만을 매진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하시게 된 동기나 스님 혼자만의 원을 세운 것이 있다면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계수스님: 스물네 살적엔가 기신론을 배우고 있는데 "知幻卽離면 離幻卽覺이라."는 게송을 듣고 책을 덮었습니다. 사교입선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때부터 한 모금의 술을 마실지언정 찌겅이는 먹지 않겠다는 큰 각오로 내 눈이 밝아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원 학생이 선방으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강원을 나오면 일차로 포교사가 되려고 대학을 가든지 학문을 넓히려고 학원을 다니지 선방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저는 제 나름대로 눈이 떠지길 기대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지장단에 가서 아홉시만 되면 원을 세웠습니다. 제가 확철대오를 하는 날까지는 장애가 없게 해달라고, 그때부터 제가 백팔 참회를 하는 것이 한 십여 년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라고 기끔 제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몇일에 걸쳐 하는 것이 아닌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하는 만배를 한 다섯 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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