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백제인, 부처님을 깨워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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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백제인, 부처님을 깨워내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8.1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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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展 - 기다림, 그 위대한 탄생 | 불교문화지킴이 | 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 노기환 학예사

백제의 역사가 다시 태어났다. 역사의 흐름에 잠겨 잊혀졌던 유물들이 그의 끈질기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잠든 유물을 다시 깨워내고, 깨어난 유물에 다시 빛을 비춰 많은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킨다. 미륵사지 동탑 복원에서부터 미륵사지의 역사를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사리장엄의 재탄생까지, 그 역사적인 순간들 속에 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 노기환(50) 학예사가 있다. 땅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불교 유물들을 찾아내 영광의 오늘을 살게 하는 불교문화지킴이를 만났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더 사랑스럽다
미륵사지를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절터.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순간, 그의 눈앞엔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미륵사지가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미륵사지에 있으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포근함을 느낍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오래 생각하고 실천하는 제 성격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매일매일 새로워 일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미륵사지와의 첫 만남은 본격적인 미륵사지 발굴과 동탑의 복원계획이 진행되었던 1991년. 어느새 24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절터 곳곳 그의 눈길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생각해보면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이 조금 식상할 법도한데, 그의 휴대폰은 직접 찍은 미륵사지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연지에 비친 두 탑이 아름다워 한 장, 미륵산을 등에 업고 절묘하게 어울렸을 옛 가람을 생각하며 한 장. 그렇게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또 간직한다. 이쯤 되면 사랑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처럼 그에게 미륵사지는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쁘고, 오래 보아야 더 사랑스러운가보다.
그렇다면 미륵사지의 무엇이 그 오랜 시간 그를 이곳에 머무르게 했을까.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음직한 그 긴 시간동안 그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늘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고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유적과 유물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웠기 때문이다. 이 터가 품고 있는 유구한 역사에 경외감이 들어 미륵사지의 역사를 밝혀나가는 복원 연구에 더 몰두하게 됐다.
“미륵사지에서 처음 맡은 일이 연지 조사였어요. 이미 10년 정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큰일은 아니었죠. 헌데 제가 보니 좀 이상했어요. 그 위치가 아닌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10년 간의 기록을 전부 되짚어봤어요. 소장님에게 연지 위치가 틀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때 소장님은 학예관이었고 저는 갓 대학 졸업한 입사 1년차 풋내기였으니 얼마나 기가 찼겠어요.” 
그러나 그는 2년 반 만에 당시의 연못의 성립시대와 규모, 성격을 완벽하게 찾아냈다.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였고 종합 보고서를 총괄 작성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 그의 손을 거쳐 간 역사들
그는 옛 모습을 머리로 상상하고 그려내기를 반복한다. 내가 그 당시 이곳에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이곳이 도량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으리라’ 하며 빈 절터를 거닐어 봤다. 그는 자리만 남은 너른 터 위에서 20세기 백제인이 됐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백제의 금동향로를 발견했다.
“공사를 위해 길을 낼 때 ‘옛 사람들이 이곳을 통로로 썼을 것이다’라는 가정에 맞춰 길을 냅니다. 이곳이 중심통로겠거니 하고 고심해서 통로를 놨어요. 기초공사를 하려고 폭 50cm, 길이 3m로 구덩이를 팠는데 구멍 폭에 딱 맞춰 향로가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부러 길 위에 묻은 향로였더군요. 만약 그 구덩이에 걸쳐서 발견했으면 향로가 상했을 거예요. ‘아, 내게 온 복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딱 50cm만 옆으로 길을 냈어도 향로는 영영 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향로는 국내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수각獸脚다리 향로인데다가 확실한 출토 경위, 완벽한 보존상태, 통일신라 대형 향로 가운데 가장 빠른 제작 연대로 문화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753호로 지정됐다. 행운은 그를 ‘유물 복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2009년 1월, 마침내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며 장엄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석탑 1층탑 중심 심주석 사리공 아래에 잠들어있던 사리장엄 복장유물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백제 무왕의 왕후가 봉안했다는 금제사리봉영기와 사리를 모신 3중의 사리기, 금제족집게,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물이 골고루 출토됐다. 유물은 1,400여년이 지난 유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출토 현장에 있을 수 없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해체와 보수를 총괄했고 보안을 유지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온 유물들과 부처님 사리는 그의 손을 거쳐서 다시 대중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시관에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시를 기획하고 유물들의 배치를 구상했다.
“전시장에 유물을 배치할 때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이 유물들을 보여주면서 그 시대를 잘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고요. 금제사리봉안기 전시장 앞에다가 봉안기에 적혀있는 전법傳法과 명신明身이라는 단어를 뽑아 프린트해놨어요. 우리 모두 옛 사람들의 가르침처럼 저렇게 살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특별전시관을 한 바퀴 돌며 사리장엄에 대해 설명을 듣는 내내,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진열대 앞에서 보살님 한 분이 구슬땀을 흘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탑 속에 계시던 부처님 사리를 친견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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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금동제사리외호(폭 7.7cm, 높이 13cm)
사리기란 사리를 모셔 놓은 그릇을 말한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기는 금동제사리외호 안에 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이 들어있는 3중첩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사리는 유리병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호 안에는 내호를 비롯해 다양한 색상의 유리구슬과 금제구슬, 향분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등이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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