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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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起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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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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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사상(제 5회)/원시불교편(5)

「붓드하(覺者)」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불교는 깨달음을 궁극의 목표에 두고 있다. 모든 냇물이 바다에 이르듯이 모든 불교 교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에 불과하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사유와 실천은 무의미하다고 부처님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지난 호에 소개한 사성제(四聖諦)는 원시불교에 설해진 여러가지 종교적 실천의 길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 또한 깨달음을 궁극의 목표에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깨달음이 원시경전에는 어떤 말로 표현되고 있을까? 이것을 살펴 봄으로써 불교의 근본사상을 간단히 살펴보려는 우리들의 이 시도(試圖)에서 원시불교편을 마무리 해도 좋을 것이다.

 깨달음의 내용을 문제로 하는 입장에서 원시경전을 살펴 볼 때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바는 거기에 설해진「十二緣起」라는 교설이다. 우선 십이연기라는 법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명(明)」이라는 개념인데 그것이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 다음과 같이 나타남을 본다.

「비구들이여 내가 사성제에서 바르게 사유(思惟)하고 마땅히 해야할 바를 알고 그것을 해 마쳤을 때(三轉十二行) 내게 눈과 지혜와 명(明)과 빛이 일어났느니라.」(雜阿含 卷 十五)

「명」이라는 말의 원어는「비댜아(vidyá)」인데,「비드(vid)」는「발견한다」「밝힌다」는 뜻과 「실재(實在)한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비댜아」는「발견되는 것」「밝혀지는 것」또는「실재하는 것」이라는 말이 되어,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명(明)」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사성제를 완전히 닦았을 때 그러한 「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성제가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깨달음」이라는 것은 본래 깨닫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발견되는 것」「밝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와 그러지 못한 자와는 이제 이 「명」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명」에 머무른 자는 부처요 그러지 못한 자, 다시 말하면「명이 아닌 것」즉 무명(無明)에 머무른 자는 중생이다. 부처는 생사의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났지만 중생은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명으로 부터 생사가 어떻게 발생되는가. 그 과정을 관찰해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경전은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보리좌(菩提左)에서 무명으로 부터 생사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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