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 가지에 만 잎사귀가 빛나니
상태바
일천 가지에 만 잎사귀가 빛나니
  • 관리자
  • 승인 2009.07.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어유희[禪語遊戱]

누군들 자기 가문의 번성을 꿈꾸지 않으랴만, 예전만큼 ‘가문의 영광’을 운운하지도 않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는 저출산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명문 종가집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반쯤은 부러움과 시샘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오래 된 종택(宗宅)은 찾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영원성을 향하는 보통사람들의 뿌리본능을 달래주고도 남음이 있다. 때로는 궁궐이 빈집인 것과 대비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손 창성을 기원하는 마음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빈부의 귀천에도 별로 차이가 없다.

심지어 모든 게 갖추어진 제왕들도 죽은 후에는 도성 백리 안의 명당을 찾아다녔다. 태어난 후에는 태실[胎室: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 자리를 찾아 전국 명산을 다니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인 1930년을 전후하여 전국에 산재하던 태실 53위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함께 이장해 옮겼으며, 현재도 태봉(胎封) 혹은 태장(胎藏)이라는 지명이 40여 군데 이상 남아 있다. 당시에 태실 관리를 위해 그 인근지역은 행정적 경제적 혜택이 뒤따랐다. 깊은 산중인 경우에는 근처 사찰이 재실(齋室) 기능까지 겸해야 했다. 경북 성주의 선석사(禪石寺)도 그랬을 것이다. 인근에 세종대왕 자녀의 태실 20여 기가 집중으로 분포된 전국 최대의 태실 자리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중 하나로 신광사(神光寺)를 창건했는데, 고려 나옹 선사에 의해 현재 자리로 이전하면서 선석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자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고, 그 인연으로 영조대왕에게 받은 어필이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칠성각이 그런 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작은 세 칸 집이지만 대웅전과 나란히 병렬하여 서 있다. 법당 뒤편에 숨어있듯 서있는 한 칸짜리 산신각과 대비된다. 일반 사찰은 보통 산신각과 칠성각이 같은 크기의 한 칸 규모로 본전과 멀찍이 떨어져 위치하는 것이 상례인 까닭이다. 칠성각은 알다시피 자손 잘 되기를 기원하는 모성애와 그 정성이 모여있는 기도처이다. 이제 21세기에 지자체의 후원을 받아 태장전(胎藏殿)을 지었고 동시에 인근구역 전체를 생명문화공원으로 조성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간적 표현을 빌자면 제대로 발복(發福)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국도인 큰 길부터 목적지로 가는 샛길까지 ‘세종대왕자태실’과 ‘선석사’는 안내표지판이 늘 함께 있었다. 왕손 20여 명이 한 자리에 태실 자리가 있는 것도 참으로 드문 일이다. 『태실의궤』, 『장태의궤』라는 이름으로 그 수습에서 안치하는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태실의 형태가 고승들의 부도탑과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태어남과 죽음이 결코 둘이 아닌 것이다. 자손과 법손의 융성을 바라는 마음은 같다고 하겠다. 마을집은 핏줄의 융성을 기원했고 절집은 법손의 창성을 발원했다. 출세간을 막론하고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보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충북 진천에 남아있다. 해동 조계종의 종조인 신라 도의 국사의 태반줄을 산모퉁이 하수(河水) 가에 묻었는데, 큰사슴들이 그 자리 지키기를 1년여 동안 계속했다고 전한다. 표지판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니 곧 태실 자리가 나타났다. 조선조 최고 성군의 왕자공주 태실지 안내문을 읽어내렸다. 당시 예조판서인 홍윤성의 글인데 『세조실록』 29권에 전문이 실려 있다. 전체 요지는 왕실번영의 축문이었다. 하지만 이 한 문장에 모든 게 압축되어 있었다.

어혁선리(於赫仙李)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