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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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다 안다
  • 관리자
  • 승인 2009.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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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목소리

“일찍 돌아 올게 잘 챙겨.”하며 출근한 남편이 삼십 분 후에 망자가 되어 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전화를 받고 다섯 번이나 까무라쳤었다는 35살 여자가 눈물 글썽이며 찾아왔다. 밤새워 남편과 아이들 사진을 정갈하게 오려 붙여 편집한 것을 복사해서 확대해 달라는 부탁이다.

아직도 눈매가 고운 그 여자의 얼굴을 훔쳐 보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옆동네 사는 시누이더러 우리 가족 사진의 셔터를 눌러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은 또 마흔 살쯤 됨직한 여자가 사진을 찍으러 와서 하는 얘기가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었다면서 아침에 출근을 안 하더라는 것이다. 농담인 줄만 알고 느긋해했는데 점심 때에 정말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노라고 심각하게 고백하면서 국수나 삶아멱자고 등 뒤에서 사온 국수 봉지를 건네주더라고 한다.

아내가 국수 봉지를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질렀더니 놀란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개배 빼물고 돌아서서 나가는 남편, 그 모습이 얼마나 측은했던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 허리에 매달려 같이 울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두고두고 마음이 울적해 있었다.

한 달 월급 고스란히 카드 대금으로 결제하고 빈 봉토 내밀기 미안해서 마누라 속옷 선물하는 간 큰 남자, 부부 싸움을 일일이 자기 어머니에게 고해 바치는 마마보이 남편, 일년내 농사지어 추곡수매한 돈 몽땅 도박으로 날리고 야반도주해 서울살이 사글세방에 몸져 누운 남자.

어디 그뿐인가. 잘난 여편네 간수하기 힘들다고 의처증 앓는 남자까지 나의 선후배 되는 우리 사진관 단골손님들의 남정네 얘기는 무궁무진하다. 조선시대가 여성 수난시대였다면 21세기는 바야흐로로 남성 수난시대가 오는 것 같다. 아들만 둘 낳아 기르는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들 가진 유세는 켜녕 슬그머니 앞날 걱정을 한다.

“밥 먹을 때는 바르게 앉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소리 내지 말고 먹어라, 먹고 난 빈 그릇은 꼭 개수대에 갔다 넣어라, 공부 잘해서 훌륭한 남자가 되어야 장가 들지, 못난 놈은 장가도 못간다. 코 쑤시는 버릇 안 고치면 네 색시한테 아들 교욱 잘못 시켰다고 엄마 욕 먹는다.” 하면서 장래 아내 비위 거스르지 않을 남자로 키우기 위해 잔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부부싸움 끝에 그래도 너그럽게 먼저 화해하는 쪽은 남자들이다. 꼭 술이 좋아서가 아니고 업무상 어쩔 수 없이 마신 술 때문에 외박도 하고 몸도 괴롭고 마음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 위로 치이고 아래서 들이 받고 여피족에게 밀리는 그 험한 세상에 나가 어려운 일 척척 해결하고 돌아오는 용기가 남자들에게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남자들이여, 365일 파업 한번 없이 시집살이에 상처받고, 술주정뱅이 남편에게 스트레스 받고, 자식 공부 시키느라고 노이로제 걸린 여자가 당신과 아이들 생각하느라고 자신은 쓴 약 한 첩 지어먹어 보지 못하고, 계절마다 묵묵히 당신이 엄살 피울때 마다 사다가 바치는 보약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덥석덥석 받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한 끼만이라도 반듯하게 남이 해준 밥 한 번 먹어 보고 싶지만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면서 알뜰살뜰 살림 일구느라 미움과 원망과 증오만 쌓은 가슴으로 끝없이 몸살을 앓는 게 바보 같은 당신의 여자다.

어느 날 문득 참 많이 늙고 추해져 있는 하나뿐인 당신의 여자를 발견하게 되거든 그때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전생부터 쌓은 인연 있어 금생에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서로 사랑하기를 제 몸 아끼듯하고 화합하여 오순도순 살아야 내생에 악연으로 만나는 일을 면하지 않겠는가.

남자들이여, 산소같이 부드러운 당신 말씀 한마디가 죽은 여자를 다시 살리고 이 세상을 더없이 행복한 낙원으로 만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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