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정각 | 정가 | 27,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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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4-05-31 | 분야 | 종교 |
책정보 |
ISBN9791193454954
쪽수432쪽 크기 152 * 224 * 32 mm / 743 g |
조선시대 승과의 양상과 전개, 그리고
조선불교의 위상을 대변하던 승과 입격자들에 관한 총체적 고찰!
‘승과(僧科)’란 승려들의 과거시험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나라에서는 특정 승려를 선출, 그들에게 승직(僧職)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 그리고 조선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 승과는 1564년 이래 폐지되면서, 명종 대 승과가 진행되었던 서울 봉은사의 승과평(僧科坪)은 현재 코엑스 구석의 표석으로만 남아 있고, 남양주 봉선사의 승과원(僧科院)은 채마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책은 역사 속에 묻힌 승과, 특히 조선시대 승과의 양상과 전개에 관해 고찰한다. 또한 옛 문헌을 통하여 조선의 각 시기별 승과 주관자(主管者)와 입격자(入格者)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전기 불교사 연구를 위한 하나의 주요 자료를 정리하려는 목적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역사 속에 묻힌 조선 승과를 우리 불교사의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로 다시금 소환해내고 있다.
“승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전강제자 운산 정각이 『조선의 승과 연구』를 쓰게 되니, 이는 종단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하나를 되살린 중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_ 여천 무비 대종사
가톨릭대학 신학과 졸업 후 송광사에 출가, 통도사 강원(講院)을 졸업하였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및 미술사학과를 수료,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비 스님을 법사로 강맥(講脈)을 전수하였으며, 조계종 교수아사리에 위촉되었다.
동국대ㆍ중앙대 객원교수 및 불교신문 논설위원, 경북 문화재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KCRP(한국 종교인평화회의) 종교간대화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중앙승가대 교수 및 이화여대 객원교수, 고양 원각사 주지로 있다. 『불교 부적의 연구』 등 17권의 책과 「천수다라니에 대한 인도신화학적 고찰」 등 50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추천사
저자의 말
I. 서언
II. 승록사(僧錄司)와 양종도회소(兩宗都會所)
1. 승관제(僧官制)와 승록사(僧錄司)
1) 삼국(三國)과 통일신라 대의 승관제(僧官制)
2) 고려시대의 승관제와 승록사(僧錄司)
2. 조선시대 승록사와 승록사 혁파
1) 조선시대 승록사와 그 역할
2) 종파(宗派) 통폐합과 승록사 혁파
3. 양종도회소(兩宗都會所)의 구성과 역할
1) 양종도회소의 구성
2) 양종도회소의 역할
Ⅲ. 조선 승과(僧科)의 양상과 전개
1. 조선의 승과(僧科), 선시(選試)
1) 선시(選試)의 형식
2) 선시와 등계(登階)
3)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과 선시의 폐지
2. 조선의 승과, 선시(選試) 혁파에 대한 고찰
1) 선시 혁파와 『대전속록』 「도승(度僧)」 조 폐기
2) 양종도회소 혁파와 『경국대전』 「도승」 조 삭제
3) 승인호패법, 또 다른 형태의 도첩제 실시
3. 명종(明宗) 대 선과(禪科) 복원에 대한 고찰
1) 양종(兩宗) 복립과 선과(禪科) 복원
2) 명종 대 선과(禪科)의 양상
4. 또다시 회복된 선과(禪科), 기형화된 모습
1) 기형화된 선과의 양상
2) 승군(僧軍)과 매골승 등 다수의 승직자 양산
3) 승단 등계(登階)의 변화
Ⅳ. 승과(僧科)의 주관자와 입격자
1. 선시(選試)와 선과(禪科)의 주관자
1) 선시(選試) 주관자
2) 복원된 선과(禪科)와 주관자
2. 선시(選試) 입격자
1) 선시(選試) 입격자의 한정
2) 태조~태종 대의 입격자
3) 세종~단종 대에 활동한 선시 입격자
4) 세조~성종 대에 활동한 선시 입격자
5) 연산군~인종 대에 활동한 선시 입격자
3. 선과(禪科) 입격자
1) 명종 대에 활동한 선시, 선과 입격자
2) 선조 대 선과 입격자의 활동
Ⅴ. 맺음말
참고문헌
조선시대 승과는 어떻게 운영되었고, 승과의 입격자들은 누구였는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승관제(僧官制)와
조선시대 승과의 양상과 전개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속 승과 전통에 관한 역사적 고찰!
승가(僧伽)에서는 일찍이 도승(度僧), 즉 출가와 관련해 시험을 행했다. 중국의 경우 승니(僧尼)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사사로운 출가를 제한하였으며, 이를 위해 경론(經論)을 독송ㆍ진술하는 시험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승직 선출에 있어 일정한 시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른 시기의 예로 『동문선』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에 ‘선덕여왕 때 지영과 승고가 중국 유학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대덕(大德)에 뽑혔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이는 대덕 선발과 관련해 일정 시험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승려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하고, 특정 승려를 선출, 그들에게 승직(僧職)을 부여한 제도를 ‘승과(僧科)’라 한다. 풀어 설명하자면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셈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승과의 양상과 전개
이러한 전통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 그리고 조선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다만 승과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려시대 처음 승과가 실시된 것은 광종 때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며, 『고려사』 등의 옛 문헌에서는 승과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고려의 승과 내지 승관제(僧官制)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도승 내지 도첩제(度牒制), 그리고 승직(僧職) 및 승관제(僧官制)와 관련된 다수 논문이 있었음에도, 승과와 관련해 몇몇 연구만이 진행되었을 뿐 총체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저자는 조선시대 승과의 양상과 전개에 관한 고찰은 물론, 조선 각 시기별 승과의 주관자와 입격자를 파악해 나간다.
저자는 먼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승관제(僧官制)에 대해 설명한다. 역사적 전통을 고찰함에 있어 그 시작점을 살피는 일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사찰 관련 업무를 관장했던 기관인 승록사(僧錄司)의 구성과 양태,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조선 초에 행해진 종파(宗派)의 통폐합과 승록사의 혁파 과정을 서술한다. 특히 혁파된 승록사를 대신한 양종도회소(兩宗都會所)의 구성과 역할을 살피는데, 그 역할 중에서 승니(僧尼)의 시재행(試才行)과 도첩(度牒) 발급, 선시(選試, 승과의 별칭)의 주관, 주지(住持)의 작첩(爵牒) 발급 등의 역할에 주목한다.
Ⅲ장에서는 조선 초부터 세조 연간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선시의 형식과 이를 통해 수여된 품계(品階)에 대해 알아본다.
이어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선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대목이 주목된다. 저자는 시기별로 선시가 혁파되고, 다시금 복원되며, 나아가 기형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여기에는 왕족의 친불적 성향이나 조선시대의 커다란 사건 중 하나인 임진왜란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Ⅳ장에서는 각 시기에 따른 승과의 주관자(主管者)와 입격자(入格者)를 파악한다.
조선시대에 승과에 입격한 자들은 당대 문인들과 견줄 수 있던 자들로, 조선시대 불교계의 위상을 대변해 주었던 자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관련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조선시대의 승과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고, 승과 입격자들의 현황과 그 활동 또한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에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류(文集類), 불상 조상기(造成記)와 불화(佛畫) 화기(畵記), 그리고 조선시대 간행 불서(佛書)의 간행질(刊行秩)을 통해 이들 각각의 명단을 파악한다. 특히 이 중 불서의 간행질에 수록된 다수의 입격자 명단은 조선 전기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될 것이다.
다시 조명되는 우리 불교사의 중요한 전통, 승과
조선시대 승과는 1564년 이래 폐지되면서, 명종 대 승과가 진행되었던 서울 봉은사의 승과평(僧科坪)은 현재 코엑스 구석의 표석으로만 남아 있고, 남양주 봉선사의 승과원(僧科院)은 채마밭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현 조계종단에서는 승과 전통을 되살려 2001년 이래 승가고시를 실시하였고, 현재는 5급에서 1급까지의 승과고시가 정례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천 무비 대종사는 이 책을 “(조계종단이 실시하고 있는 승과고시를 뒷받침할) 승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종단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하나를 되살린 중요한 업적”이라 하였다.
역사의 한켠에 묻힌 승과 전통을 우리 불교사의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로 다시금 소환하는 것,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일 것이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불교가 동쪽으로 점점 퍼진 것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주지(住持)를 받드는(修奉) 것에 규범이 없다. 무릇 통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하였다 …(중략)…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 550)에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1인을 두었고, 또한 소서성(小書省) 2인을 두었다. 다음 해 신미(辛未, 551)에 고구려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는데 또한 사주(寺主)라고도 하였고, 보량법사(寶良法師)를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아 1인을 두었고 주통(州統) 9인, 군통(郡統) 18인 등을 두었다.” _ 28쪽
고려시대의 경우 승관제를 관할하는 관청으로서 승록사의 양가(兩街) 체제를 알려주는 예로는 1022년(太平 2) 기록된 「고려국영축산 대자은현화사비(高麗國靈鷲山大慈恩玄化寺碑)」 음기(陰記)를 들 수 있다. 이 음기에는 현화사(玄化寺)에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고 경전을 간행할 때 공이 많았던 사람을 시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관사(官使) 좌가도승록(左街都僧錄), 부사(副使)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과 우가부승록(右街副僧錄), 판관(判官) 우가승정(右街僧正), 승기사(僧記事), 속기사(俗記事) 등이 명기되어 있는 것이다. _ 34쪽
966년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는 ‘좌승유(左僧維)인 대덕(大德), 우승유(右僧維)인 대덕’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 진흥왕 11년(550)에 정립된 승관제 중 대도유나(大都維那)와 관련된 것으로, 이를 하위법계인 대덕이라 칭하고 있음을 볼 때, 승유(僧維)란 직책은 판관인 승정(僧正) 밑에 속한 승직(僧職)이었으리라 추정된다. _ 35쪽
고려시대의 승관제 및 승록사의 구성은 조선 초기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태조는 고려불교의 제도에 따라 왕사와 국사를 책봉하였다. 태조 즉위 원년(1392) 9월 18일 고려 공양왕의 국사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가 입적하자 ‘(태조) 임금이 듣고서 애도하였고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하며, 태종 원년(1392) 10월에는 조계종의 무학자초(無學自超)를 왕사로 삼고, 즉위 3년(1394) 9월에는 선교총섭(禪敎摠攝)이던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다. _ 37쪽
승과(僧科)란 승려 가운데 승직자(僧職者)를 뽑기 위한 과거시험으로, 조선 초에는 선시(選試)ㆍ시선(試選)ㆍ승선(僧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선시(選試)가 26회, 시선(試選)이 17회, 승선이(僧選) 7회 언급되어, 조선 초기의 경우 승려의 과거 즉 승과를 칭함에 선시란 용어가 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시 폐지 후 부활된 명종 대에는 승과(僧科)란 용어가 2회 사용되었으며, 이후 173회에 걸쳐 선과(禪科)란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명칭이 있음에도 승려 과거의 형식에는 큰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_ 66쪽
청허휴정의 유품 중 “중덕대선(中德大禪)의 홍패(紅牌) 1장(張)”이란 내용은 중덕(中德)을 ‘중덕대선(中德大禪)’이라 칭했던 예와 함께, 선시를 통해 홍패교지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예가 된다. _ 95쪽
선시는 유가의 과거와 흡사한 형태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실록』 15년(1415) 11월 기사
에는 형조(刑曹)에서 각 품(品)의 노비(奴婢)의 수를 다시 정하여 아뢰었는데, “승인(僧人)은 각종(各宗) 판사(判事) 이하 선사(禪師) 이상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15구(口)이고, 중덕(中德) 이하 대선(大禪) 이상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10구(口)이고, 무직(無職) 승인(僧人)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5구(口)이고…”라 하여, 노비를 소유할 수 있는 수를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이에 의하면 ‘중덕 이하 대선 이상은 (노비) 10구를 거느릴 수 있는’ 신분이기도 하였다. _ 99쪽
양종(兩宗) 설립은 양종에 판사를 두어 승단을 장악, 안정케 하고자 했던 금승(禁僧) 대책 중 하나였으며, 시험을 통해 승직자를 선출하는 선시(選試) 역시 승단 통제를 위한 금승 대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또한 ‘시재행(試才行)’과 정전 납부를 통한 도첩 발급은 승(僧)의 증가로 인한 군액(軍額)의 감소를 막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모두 금승 조치의 예로 이해될 수 있다. _ 100쪽
세조의 호불 성향으로부터 시행된, 선시(選試)와 정전(丁錢) 납부 여부를 떠나, 부역승에 대한 도첩 발급과 승인호패의 발급을 통한 승(僧)의 증대는 세조 사후(死後), 예종(睿宗)으로부터 성종과 연산군, 중종 대에 이르러 선시 폐지 및 도첩제 정지, 양종 혁파의 빌미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_ 106쪽
『예종실록』 예종 즉위년(1468) 9월의 다음 기사는 세종과 세조 대에 활약한 신미(信眉), 수미(壽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영향이 왕실에 널리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_ 108쪽
세조 4년 이래 1471년까지 14년간 『대전』 ‘도승’ 조의 규범에 따라 시경(試經)과 정전 납부 후 도첩을 받은 자가 12인밖에 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으로, 『대전』의 ‘도승’ 조 규범이 무력화된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한편, 부역을 통해 몇만 명이 도첩을 받았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런 세태에 따라 불교 정책에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_ 113쪽
부역 내지 선시(選試)에 따른 도첩 발급에 대한 상소뿐만이 아닌, 『대전』의 예에 따라 3년마다 선시(選試)로 승려를 선발하는 것과 승려를 계문(啓聞)한 뒤에 수금(囚禁)함, 그리고 사찰을 수색하는 데 계문하는 법 등 불교 우대 조항을 폐지하자는 상소 역시 성종 15년 이래 성종 22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_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