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을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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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을 하기
  • 관리자
  • 승인 2008.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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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縱橫無盡) 상담실

이곳 동국대 수행관에서는 수업이 없는 휴일에는 아침예불과 발우공양을 마치면, 도반 스님들은 법회도 나가시고, 옷에 풀도 먹이고, 함께 차담도 하고, 가까운 북한산이나 평창동 일대를 포행하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늘 있는 일상이지만 도란도란 들려오는 비구니스님들의 얘기나, 간간히 찰진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합니다. 휴일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햇볕을 즐기다 보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참 감사하고 행복해집니다.

흔히 잔인한 계절 4월이라고도 합니다. 이 달의 종횡무진 상담실에서는 지난 세기, 수덕사 일엽 스님의 속가 때 친구였으며 프랑스에서 최린과의 불륜의 연애로 인해 고통을 선택했던, 여류화가 나혜석 님이 자신의 이혼 고백장에 쓴 고해를 사례로 삼아 보고자 합니다.

“제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고,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를 맞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저주스럽지만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도 재기하려 합니다.”

이후 그녀는 유랑생활을 하며 출가를 결심했으나, 출가의 인연을 만나기보다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지은 수덕여관에 기거하다가, 말년을 외롭게 서울의 한 행려 수용소에서 죽어 갔습니다. 운명 앞에 필사적으로 재기하고자 하는 그녀의 절절함에,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출세간의 세계에 있는 저는 침묵의 언어로 이렇게 답하고자 합니다.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설사 그 운명이 저주스럽고 비참할지라도 재기하려는 님의 굴하지 않는 의지가 멋져 보이고, 후대의 여권을 위한 노력에 감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님의 비참함과 저주스러움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 아파보여서, 우선 아무 것도 안 하기를 권해 드리고 싶군요. 그리고 아울러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당신 자신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권하고 싶네요.”라고 말입니다.

또한 “님께서 지금의 상황을 모두 다 잃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지금 내게 있는 것, 예를 들어 천부적 재능, 건강한 육신 등등을 하나하나 세어 보시고 그것에 지족하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라고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분에게 상담을 하는 상황의 설정으로 인해, 상담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직접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떻게 상담이 전개되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Souza)’의 시 한 편을 읽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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