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헌 스님의 최후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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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스님의 최후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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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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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哀悼)에 부쳐

   동헌 노스님은 가셨다. 지난 9월 9일 새벽 3시 화엄사 9층 선원 염화실(拈花室)에서 영원한 미소 속에 동헌 노스님은 가셨다. 한국불교 근대 100년의 산 증인으로서 굳고 곧은 신념에 체현자로서 그리고 환성(幻惺), 용성(龍城)을 이은 종문의 안목으로서 동헌 노스님은 너무나 우리에게 크신 의지였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찍혀진 노화상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정법호지에 헌신한 열렬한 호법자이셨고 언제나 따사로운 햇빛 같은 자비하신 노스님이었다. 종단이 아직도 방향을 잃고 술렁대는 작금에 종단 원로로서 크신 유촉 남기시고 당신은 가셨다.

   노사(老師)는 일본이 한창 침략의 기승을 부리고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며, 한편에서는 독립지사들에 의해서 독립문이 세워지던 조선조 말, 고종 33년(1896년) 3월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셨다. 대대로 유학(儒學)의 가문이었고 증조부가 영의정, 조부가 한성부사 그리고 석학이었던 중부(仲父)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0년간에 수학을 마치고 충남 연기에 있던 광동(光東)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24세에 3·1운동을 맞고 비분강개 끝에 뜻을 불경(금강경)에 두고 28세(1924년) 때에 중부의 소개로 칠불선원 조실이신 용성 화상에게 출가하였다. 노화상이 올해로 88세이시니 60년의 한국불교를 살아오신 것이다. 이만하면 족히 근대 한국불교를 증언하는 탑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은 33인중 1인이신 백용성 화상에게서 일대시교를 배우고 선문에 투신하여 전국의 산야를 누볐다. 금강산 마하연, 백양사, 운문, 선암사 칠전, 천성산 대원, 도봉산 망월, 화엄사 탑전, 등 유수한 선원들은 스님의 피와 땀이 베인 수행의 자리였다. 드디어 용성 화상에게서 인가를 받았으나 스님의 수행은 일생을 이어갔다.

   1954년 정법을 회복하고자 불붙은 불교정화운동은 스님을 통해서 크게 확산 되었다. 1954년에 전라북도 종무원장, 60년에 범어사 주지, 69년에 재단법인 대각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시고, 71년에 종단 원로로, 75년에 화엄사 조실로 추대되어 한결같이 호법과 교화에 온 생애를 바쳤다.

   스님은 한국불교 수행인의 전통적인 생애를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살아가셨다.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며 오후(悟後)에는 교화 호법에 몸 바친 거룩한 생애는 한국불교 수행인의 영원한 표격인 것이다.

   옛 사람은 죽을 때 두고 보자 한 말이 있다. 평상시에는 입을 잘 놀리지만 막상 입으로 큰소리치는 것이 죽음에 이르러 얼마나 실지가 있는가를 두고 보자는 말이다. 동헌 스님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시봉하는 제자가 최후에 유계를 청하였다.

  『스님! 중노릇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요.』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저 부처님 계행대로만 하라 그것이 잘하는 거지……』

   중노릇은 불법수행에 표본이다. 그것은 겉으로 그릇을 갖추고 그 안에 알맹이를 담는 것이 순서이다. 그 겉모습을 다듬고 나아가 안으로 실다움을 함께 거두게 하는 것이 계행이 아닌가. 그러기에 부처님 열반 때에는「부처님 멸도 하신 뒤 누구를 스승 하오리까?」물었을 때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노스님의 이 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60년의 출가 생활로 실천해온 실지로 대답해 주신 것이다. 참으로 만근의 무게가 있는 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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