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라 편(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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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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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2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

중국사람을 일깨우고 귀군한 대국통 자장

삼국의 전쟁이 치열할 때, 세 나라 중에서 모든 여건이 가장 불리하였던 신라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어 결국은 삼국통일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통일 직전의 어려운 시기에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신라의 지성사회(知性社會)와 정신계(精神界)를 지도했던 자장(慈藏)법사의 공적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장법사의 생애를 편의상 입당(入唐(이전), 당나라에서의 활동, 귀국후의 활동으로 나뉘어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1)당나라에 가기 이전

김씨 왕족인 진골(眞骨)의 혈통으로 소판(蘇判) 벼슬의 무림(茂 ․ 武林)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늦게까지 아들을 못둔 그 부모는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관세음보살 상을 천부(千部)나 조성하고, ⌜아들을 낳게 되면 법해의 진량(法海 津梁, 불법의 가르침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나루와 교량)이 되겠금 출가시키겠습니다.⏌라고 축원하여,그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가 부처님의 탄생일인 4월 초파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고 하였다 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인 선종랑은 장성한 뒤 인간세상의 무상(無常)을 더욱 느끼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가정을 떠나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마 효성이 지극한 그가 「법해의 진량」이 되게 하겠다는 그 부모님의 서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식으로 하여금 가계(家系)를 잇게 하고 스스로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의 길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맹수가 들끓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움막을 매어 조그만 방을 만든 그는 방안 주위에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그 가운데 옷을 벗고 앉아서 머리채(그때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으므로)는 천장에 달아매었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졸음에 빠지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거기에서 백골관(白骨觀 또는 枯骨觀)을 닦았다. 백골관이란 열반경 성행품(涅槃經 券12 聖行品 第7-2)에 자세히 설해져 있는 수행방법이다. 자신의 몸 전체를 통해서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개공(皆空)을 실증하는 관찰법<灌法>이다.

그가 아직 정식 출가자가 아니면서도 그처럼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있을 때, 나라에서는 대신 자리 하나가 비게 되어 그 후임으로 선종(善宗)이 내정되었다. 당시에는 출가하여 승려가 될 경우에 반드시 먼저 국왕의 승낙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 국왕도 그를 대신으로 삼을 수가 없다. 조정에서는 선종이 출가승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의 자리를 맡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누구나 갈망하는 영광스러운 일인데도 선종은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백골관을 닦고 있는 그에게는 대신의 높은 감투도 우스울 뿐이었다. 여러번 불러도 응하지 않자 왕은 크게 노하여, 끝내 불응하면 그의 목을 베도록 엄명하였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수행자 선종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서릿발같은 칼날 아래서도 태연하게

「내 차라리 단 하루라도 계(戒, 바른 修行생활)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파계(破戒)하면서 백년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吾?一日?戒而死不願百年破戒而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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