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로비나 코틴
상태바
[서양의 불교] 로비나 코틴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보세요! 현재의 당신을 만든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이 말을 필요 적절할 때마다 던진다고 말하는 이 스님은 누구인가? 로비나 코틴(Robina Courtin) 비구니스님은 쉽고 간단한 이 말 속에 붓다가 저 높은 데 앉아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옆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불교의 기본사상인 업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인이며 티벳불교 겔룩파 스님인 로비나 코틴은 5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까지 사회활동과 불교수행이 같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도저히 누를 수 없는 열정과 분노의 소유자였던 그는 불교를 만나면서 열정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는 지난 26년간 불교출판사 위스덤에서 편집국장직을 10년간 수행했고 이후 서양인을 위한 겔룩파의 수행센터 세계네트워크인 대승불교보존재단(FPMT)의 월간지 만달라(Mandala)의 편집장직을 6년 동안 수행했다.

1997년부터는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해탈감옥 프로젝트(Liberation Prison Project)를 책임운영하며 미국 전역의 수감자들을 돕고 있다. 미국 내 150개 감옥 400명 수감자의 정신적 갈망을 만족시켜주는 스님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사형수 내지 종신형자이다.

스님은 사형수들 옆에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어린 시절 폭행과 강간을 겪었던 그이기에 체험과 이해에 뿌리를 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스님의 맑은 지혜는 살인범과 폭력범들을 진정시키는 힘을 발산한다.

스님의 스승 조파 라마는 종신형을 사는 한 젊은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당신이 갇혀있는 감옥은 보통사람들이 갇혀 살아가는 감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화의 감옥, 자존심의 감옥, 집착의 감옥, 자신에 연연하는 감옥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스님을 보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과연 맞음을 실감한다. 너무나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과 트럭운전수를 방불케 하는 걸쭉한 욕설에는 힘이 넘친다.

지금도 여전히 가짜와 척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이 나서 참기가 힘들다. 또 외롭고 불행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금방 눈물이 흐른다. 아무도 못 말리는 넘치는 에너지의 소유자인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메리카에 법문여행도 열심히 하고 있다.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그의 법문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통합적이고 실질적이다. 복잡한 교리를 단순하고 알기 쉽게 풀어내는 그의 강의는 특히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는 서양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특히 2000년 크리스마스 무렵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때는 아래층이나 위층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려 소란한 환경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감옥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의연한 진행을 해 참석자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강의가 되었다고 한다.

붓다하우스에서는 그의 법문 테이프를 들으며 감옥에서 공부하다가 출옥한 사람 둘을 직접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멜버른의 가톨릭 가정에서 일곱 자녀 중 하나로 1944년 원숭이해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수사가 되기를 원했고 그러다가 12살 때엔 수녀가 되겠다고 부모에게 무릎 꿇고 애걸까지 했던 그녀는 그러나 19살 때 동시대 또래집단이 그러했듯이 신을 버리고 절제를 모르는 생활로 들어섰다.

“나는 섹스와 마약과 재즈가 좋았어요. 히피가 된 거지요.”

클래식 성악을 전공하던 그는 1967년 런던으로 가서 죄수들을 돕는 감옥봉사를 시작했다. 1972년 멜버른으로 돌아와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던 중 무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멜버른과 뉴욕에서 정신 수련의 일환으로 가라데를 몇 년간 배우며 검은 띠를 따기도 했다. 그 덕분에 후에 달라이 라마의 보디가드를 잠시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던 예세 라마와 조파 라마를 만나 장기수련회를 마친 그는 마치 고향집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윽고 네팔의 카트만두로 가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하고 1977년 11월 코판 승원에서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삶은 조카 아미엘 코틴-윌슨에 의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부처를 좇아서(Chasing Buddha)’는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최고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를 기해 2000년 11월에는 TV 방송망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 방송되었다.

지난 2003년 말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던 불교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부처를 좇아서’는 스님이 매해 주관하는 인도성지순례여행의 테마이기도 하다. 작지만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수감자들을 돕는 데 쓰인다.

처음 불교에 입문할 때를 스님은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내 마음이 원하던 것을 찾았다. 그 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았다. 32년간이나 찾고 또 찾던 것을 드디어 만났구나 확신했다.” 그리고 이제는 20여 년의 승려생활을 되돌아보며 말한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집착을 놓아버리고 질투와 분노도 버리고 싶었다. 승려가 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승려의 길은 내가 절대적으로 걸어가고 싶은 길이다.”

자신의 승려 생활이 이전의 정치적 꿈과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라는 스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꿈은 여전히 가슴속에서 선명하며 다만 승려가 된 이후 방법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사회적 좌파로서 운동권이었기에 당연히 반종교적이었던 그가 어떻게 승려가 되었을까? 몇 년을 정치운동에 열심이던 그에게 어느 날 홀연히 작은 깨달음이 왔다. 처음에 마약을 할 때는 마약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했었다.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을 할 때는 백인들을 비난했었다. 여성운동을 할 때는 남성들을 비난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비난할 사람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던 자신이 이제는 내면으로 걸어 들어와 자기 자신의 자리에 앉은 기분이었다.

스님이 가진 것은 다만 한 벌 갈아입을 옷뿐이다.

“난 집시예요. 그게 나한테 맞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계속 여행해야 하잖아요.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매일 저녁 스님은 죽음을 맞는 사람처럼 하루를 정리한다. 그는 그 과정을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고 부른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