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6.계빈국의 수도, 카불(ka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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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오천축국전] 36.계빈국의 수도, 카불(kabul)
  • 김규현
  • 승인 2007.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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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왕오 천축국전 별곡 36

초토화된 카불 시가지

카이버 고개를 떠난 혜초 사문은 도중에서 불교가 번창하였던 남파국에 잠시 머물다 다시 길을 떠나 8일 만에 계빈국의 수도 카불(Kabul)에 도착하였다. 그 길을, 224km를 우리는 하루 걸려 도착하였다. 서둘렀는데도 카불에 가까워 왔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탕기가루(TangiGharu)라는 큰 협곡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곳을 빠져 올라오는 데만도 몇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 카불은 지형적으로 천혜의 요새였다. 그 협곡은, 지키는 입장에서는 ‘일당백(一當百)’, 아니 ‘일당만(一當万)’의 방어도 가능할 것 같은, 그런 난공불락의 관문(關門)처럼 보였다. 구 소련이 10여 년간 아프칸을 공격하였지만 끝내 카불을 함락하지 못한 것도, 탈레반정권이 미국을 향해 큰 소리 친 것도, 이런 지형적 이점을 믿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협곡을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올라오니 거기서부터는 믿기 힘들 정도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바로 해발 1,700여 미터의 카불고원이었다.

카불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중심가라는 곳에 내렸는데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개인적으로 발전기를 돌린 몇몇 상점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거리 전체는 깜깜절벽이었다. 다만 경광등을 켠 비상차량들만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출발 전에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밤에는 통행금지가 있을 뿐더러 총알과 로켓 포탄이 심심찮게 날아다닌다는 것이었고 또한 경찰이나 군인들이 외국인에게서 공공연하게 달러를 강탈해간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듣고 온 터라 카불에서의 첫날밤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변변한 가이드북 하나 구할 수 없이 도착지라 우선 하루 밤의 숙소가 문제였다. 파키스탄에서 급조된, 한일합동 배낭족인 우리 일행은 절반은 짐을 지키고 절반은 시내를 뒤져서 겨우 불도, 물도 안 나오는 허름한 호텔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춥고 불안한, 그러나 감개무량한 하루 밤을 지새우고 맞은 카불의 새벽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상큼하였다. 출근 시간이 되자 온 시가지는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모를 차량과 인파에 발을 디딜 정도가 없을 정도로 가득하였다. 간밤엔 유령도시처럼 비어 있었던 것과 비교되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은 전쟁의 포연이 끊이지 않았다. 1973년까지 이어온 봉건왕조가 붕괴된 후 좌익 아프칸공화국이 수립되어 자리를 잡기도 전에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자 이를 기회로 이웃 우즈베키스탄까지 집어삼켰던 구 소련이 1979년 아무다리아(Amu Dariya) 강을 건너 침공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알라 아크바(신은 위대하도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이른바 ‘무자히딘’이라는 이슬람 전사들이 반정부, 반소련의 기치를 내걸고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92년 구 소련이 맥없이 붕괴되며 자동적으로 아프칸에서 철수를 하자 정부군으로 화살을 돌린 그들 전사들은 숫자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카불을 탈환하고 정권을 세웠지만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1996년, 파키스탄의 파슈툰족 대학생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난민들이 합작으로 무장 게릴라조직을 결성하여 무자히딘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점차로 세력을 넓혀가며 마침내 카불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탈레반’이다.

그 후 이들은 이슬람 원리(原理)주의라는 과격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이슬람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타락한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철권정치를 하게 된다. 그러다 2002년 9월 11일에 일어난 뉴욕의 무역센터 폭파의 배후로 지목되어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공격을 받아 이 탈레반 정권은 맥없이 궤멸되어 버렸다. 그렇게 아프칸은 꼭 30년 동안 전쟁에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현재 카불은 미군을 제외한 연합군 ‘아이사프(ISAF)’가 치안유지를 맡고 있는 가운데, 새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제정에 착수하고 있다.

사히스 사원(沙絲寺, Sahis)은 어디인가?

이렇게 아직 초연이 그치지 않은 카불에서 불교신행단체인 정토회(淨土會, J.T.S)가 N.G.O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수십 개 되는 타종교 단체 속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두 분 법사님을 비롯한 여러 자원봉사들이 뜻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 보기에도 흐뭇하였다. 게다가 따끈한 숭늉과 꿀맛 같았던 김치까지 얻어먹는 호강까지 누릴 수 있었고 유정길 법사의 도움으로 카불 시내 외곽의 불적지 답사에 나설 수 있었다. ‘해동의 나그네’가 찾고 싶었던 곳은 바로 혜초의 구절에 나오는 ‘사히사’라는 곳이었다.

혜초는 카불을 계빈국이라 칭했다. 그리고는, “왕은 여름에는 계빈국에 있으면서 서늘한 곳에서 지내고, 겨울에는 간다라국에서 지낸다. 간다라는 눈이 없으므로 따뜻해서 춥지 않고 계빈국은 겨울이 되면 눈이 쌓여서 추워진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카불은 대 간다라국의 여름수도였던만큼 당연히 불교사원이 많았다.

혜초도 이를 지적하여, “삼보를 크게 공경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백성들 집에 각각 절을 만들어 삼보를 공양한다. 성안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사사사(沙絲寺, Sahis)다. 절 안에 부처님의 모발과 뼈와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 왕과 관리와 백성들이 매일 공양한다.”

그러니까 여래의 진신유골과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히사’라는 절이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비록 사원은 남아있지 않을지라도 훼손이 용이하지 않은, 사발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형태의, 쿠샨왕조 시대의 스투파(Stupa)는 형체라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일단 자료를 뒤져 카불 인근의 스투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현재 어렵게 구할 수 있는 이 방면의 가이드북은 듀프레(Nancy Dupree) 여사의 『An Historical Guide To Afghanistan(1977)』이 유일한 것인데, 다행히 이 책에 카불 근교의 두 군데 스투파군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굴다라(Guldara) 스투파인데, 원형에 가깝고 사원 유지까지 남아 있다고는 하나, 시내에서 22km 떨어진 곳에 있으니 일단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음은 근교에 있는 세와키(Shewaki) 마을에 있다는 스투파로 대상이 좁혀졌다.

시내를 벗어나 카불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산을 향하다가 바라히샤 마을 조금 더 들어간 지점에서부터 예의 스투파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대충 15m 정도 되는 전형적인 쿠샨시대의 스투파였는데, 비록 도굴은 되었지만 형태는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다시 장소를 이동하여 또 다른 두 개의 스투파와 사원 터로 보이는 곳을 뒤지다보니 산 위 말안장처럼 생긴 곳에 탑 같은 것이 올려다 보였다. 자료를 뒤져보니 그 곳은 ‘탁티이샤’라는 산으로 그 위에 미나리 차카리(Minar I Chakari), 글자 그대로라면 ‘법륜상(法輪像)을 세운 첨탑(尖塔)’인데, 3세기 쿠샨시대에 세워진 약22m 되는 기둥이라고 적혀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범상치 않게 보여 호기심이 부쩍 일어났지만, 그러나 산에는 수많은 지뢰가 묻혀 있고 더구나 해까지 떨어지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접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탈레반 때 몇 번을 폭파시켰는데 아직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이었다.

내려오면서 다시 돌아보니 세와키를 비롯한 세 스투파가 모두 일직선을 이루고 서 있어서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었는데, 그 방향 끝에는 한 눈에도 ‘절골’에 해당되는 야크다라(Yakhdara) 계곡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지금도 옛 토기들이 길 위에 무심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문득 ‘이 곳이 사히사 유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감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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