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남로(西域南路)’의 성쇠(盛衰)
호탄에서 서역남로를 따라오면서 혜초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천년의 침묵에 들어갔다. 자, 그럼 우리도 아쉽지만,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구절을 읽어야만 하겠다.
“또 안서에서 동쪽으로 가면 옌지[焉耆]에 이른다. 여기에도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왕이 있는데 백성은 호족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은데 소승이 행해진다. - 글자가 빠짐- 이것이 곧 안서(安西) 사진(四鎭)의 이름들이니 첫째가 안서, 둘째가 호탄, 셋째가 카슈가르, 넷째가 옌지이다. - 글자가 빠짐 - 중국 법을 따라서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바지를 입는다. - 이하 완전 결손 -”
그러니까 현 깐수성[甘肅省] 옌지에 해당되는 부분의 다음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혜초의 필사본은 백년 전, 뚠황의 천불동에서 발견될 때부터, 그 다음 부분이 없었다. 물론 3권짜리 목판본 『왕오천축국전』 원본이 기연(奇緣)에 의해 발견되면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위 구절이 마지막 구절인 것이다.
이미 혜초가 옌지를 지나갔던 당시, 그 근처에 있었던 옛 누란왕국-선선(露善)국은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한 세기 먼저 지나갔던 현장 때에도 마찬가지였던지, 그도 귀로에 서역남로를 거쳐 누란왕국의 경내를 지나가면서 신기루 같은 이름만 남기고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간 한 전설적인 왕국을 생각하고는 간략히 기록하였다.
“대유사(大流沙)를 건너면, 성곽은 높이 솟아 있으나 인적이 이미 끊긴 찰마다나(沮末國) 옛터를 지나 다시 천리를 가면 나바파(納縛波) 즉 누란국(樓蘭國)의 옛 터에 이른다.” 그러나 그보다 두 세기 먼저 지나갔던 법현(法顯)의 『불국기』에는 선선왕국, 즉 누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399년 뚠황을 떠난 법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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