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굴리어 한 발짝 나아가야 고향에 갈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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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굴리어 한 발짝 나아가야 고향에 갈 수 있으리
  • 관리자
  • 승인 2007.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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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사명유정

서산 대사의 1,000여 제자 가운데, 스승을 가장 많이 닮았으며, 스승과 같은 길을 걸은 분이 사명 유정 대사이다. 전란 중에는 스승의 길을 받들어 나라를 구하고, 전란 후에는 금강산 유점사를 다시 일으키고, 왜군이 강탈해 간 통도사 부처님 진신사리를 되찾아 건봉사에 봉안하는 등 해동 불교를 바로 세우는 데 혼신을 다했다.

유정 대사는 1544년 풍천 출신으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고, 호는 송운(松雲) 자는 이환(離幻)이며 사명은 스스로 붙여 부른 호이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고, 13세 되던 해 당대의 대 석학 황여헌(黃汝獻)에게서 『맹자(孟子)』를 배웠다. 16세 되던 해 김천 직지사에서 신묵(信默) 대사 문하로 출가하였다. 출가한 지 두 해 만에 승과에 수석 합격하고, 박순(朴淳), 고경명(高敬命), 허균(許筠) 등 지식인들과 교류가 깊었다. 이들 유림과의 교류는 훗날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 힘이 되어준다. 32세 되던 해 당시 선종 수사찰(首寺刹)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일생의 스승 서산 대사를 찾아 묘향산으로 들어간다.

서산 대사 문하에서 정진하다 35세 되던 해부터 금강산, 팔공산, 청량산 등을 돌며 수행한다. 43세 되던 해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득도한다. 밤 사이 내린 소나기에 절 마당의 꽃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 어제 핀 꽃 오늘은 빈 가지로다. 삶도 그와 같은 법이거니와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데 어찌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가… 부처도 마음 속에 있는데 어찌 밖으로만 내달리는가.”라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내린다.

이후 49세에 임진왜란을 맞아 “여래가 세상에 나오신 까닭은 중생을 구하기 위함이로다. 왜군들이 우리 백성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자비의 가르침을 참으로 실천하는 길”이라 하고, 승군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정유재란 후에는 전란으로 상처 입은 조선인의 마음을 수습하며 지냈고, 1604년 왜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되어 왜군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포로로 끌려간 3,50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전란을 수습한 후 64세에 치악산으로 들어가 주석하였으나, 병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로 가 병을 치료하다, “사대(四大)가 헛되이 모인 이 몸, 이제는 참(眞)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내 이제 입멸에 들어 순리에 따르고자 하노라.”는 법문을 하고 1610년 입적하였다. 이때 속랍 67세, 법랍 54세였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니, 일평생 전란을 당해 고통받은 백성을 제도한 자취에 걸맞다 하겠다. 젊어서부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모두 전란에 불타고, 남은 것이 거의 없다. 현재 『한국불교전서』에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7권이 전하나, 「화엄경발(華嚴經跋)」과 「법화경발(法華經跋)」 등의 짧은 글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시문으로 남아 있다.

청송사(靑松辭)

소나무여 푸르고 푸르도다

온갖 나무와 풀 가운데 으뜸가는 군자로다

서리와 눈발에도 상하지 아니하고

비와 이슬에도 꽃을 피우지 아니하는도다

상하지도 아니하고 꽃을 피우지 아니하면서

겨울을 지나 여름이 오도록 변하지 아니하고

늘 푸르고 푸를 뿐이로다

푸르고 푸른 소나무여 달빛이 드니 금으로 장엄하고

바람이 드니 맑게 우는 가야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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