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않고도 본래 지닌 성품을 들어 알고 보지 않고도 참 마음을 살피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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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않고도 본래 지닌 성품을 들어 알고 보지 않고도 참 마음을 살피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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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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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 정관 일선(靜觀 一禪, 1533∼1608)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불교는 서산(西山) 대사라는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뻗어 나온 정맥(正脈)들에 의해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기를 맞이한다. 국난 한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구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불교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의 큰 버팀목이 된다. 1,000여 년 세월 동안 흐르던 해동 불교가 침체기를 거쳐 서산 대사로 모였다가 다시 사해(四海)로 흘러 나가 국토를 윤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산 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에 이른다. 조선 불교를 서산종(西山宗)이라고 일컫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대사의 가사 자락에 덮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수많은 정맥 중 사명 유정(四溟 惟政), 편양 언기(鞭羊 彦機), 소요 태능(逍遙 太能), 정관 일선(靜觀 一禪)의 네 제자가 있어 4대 문파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정관 일선은 속리산 법주사와 덕유산 백련사(白蓮寺) 등에서 서산 대사 이후의 불교를 굳건하게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법명이 일선이고 정관은 스스로 붙인 호이다.

속성은 곽(郭) 씨이며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1547년(명종 2년)에 백하 선운(白霞 禪雲) 대사에게서 법화경을 배웠고, 후에 서산 대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정관 일선 대사의 행적은 많이 알려진 것이 없으나, 늘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승단 전체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 아래 전란에 참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난 후, 정관 일선은 사명 유정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출가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글을 보냈다. 서산 대사 문파의 맏형으로서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정관 일선은 서산 대사의 심법(心法)을 전해 받았다.

1608년 선조 41년에 세수 76, 법랍 61세로 백련사에서 입적하였다. 임성 충언(任性 沖彦) 등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로 문파를 이루었다. 제자들은 대사의 사리를 수습하여 속리산 법주사와 덕유산 백련사에 부도를 세웠는데, 백련사의 부도는 입적한 이듬해 광해군 원년에 세워졌으며 현재도 천왕문 앞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관 대사의 저술로는 입적 후 13년이 지난 1621년, 제자 보천(普天)이 시문을 모아 펴낸 『정관집(靜觀集)』 1권이 전한다. 대사의 시문은 혼란 가운데서도 본분을 잃지 않는 수행자의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제8책 23쪽∼34쪽에 실려 있다.

임종게(臨終偈)

세 척 취모검*(吹毛劍)을 오래도록 북두칠성(北斗七星)에 감추어 두었더니 텅 빈 하늘에 구름이 다 걷히고 난 후 비로소 한치 어긋남도 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나는도다

증선자(贈禪子)

수행자는 모름지기 세속을 떠나

발우 하나 지니고 세상 모든 일을 벗어 던지는도다

속세를 벗어난 노을과 안개, 마음에 흡족하니

중생의 어지러운 욕심과 번뇌, 좇을 일이 없도다

유유(悠悠)한 세월, 마음 따라 한가로이 보내며

산천을 따라 자재로이 노니는도다

말(言語)을 좇아 본래 지닌 성품을 구하는 일,

불구덩이를 파헤쳐 물거품을 찾는 일과 같도다

증맹롱선노(贈盲聾禪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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