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벗어난 어느 청산이 푸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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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벗어난 어느 청산이 푸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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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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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

한국불교사상, 당대 사회 상황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가장 비중 있는 논란이 많은 분을 꼽으라면 대체로 태고 보우 화상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보우 화상 스스로 만들어 낸 논점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조계종 법통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그의 위상, 그가 이은 선종(禪宗)의 법맥 문제, 고려 말 출가 승단과 정치 권력과의 관계 등은 고려 말에 국한된 역사적 논점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 한국불교사 전체와 미래 한국 불교의 위상에도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보우 화상은 13세 때인 1313년 회암사에서 광지선사(廣智禪師) 문하로 출가했으며, 가지산 총림에서 수행하였다. 1319년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들고 참구하였으며, 그에 앞선 1329년 화엄선과(華嚴禪科)에 합격한 기록으로 미루어 선교(禪敎)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수행으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불교통사』에는 1333년과 1337년 오도를 경험한 후, 무자(無字) 화두에 정진하기 시작하였으며 38세 되던 해, 1천 7백 공안을 참구한 후 크게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후 소요산 백운암, 삼각산 중흥사 태고암 등에서 정진하며 백운암가, 태고암가 등 여러 시가(詩歌)를 남겨 수행의 자취를 남겼다. 1346년 봄 원(元)에 가 석옥 청공을 만나 인가 받은 후 귀국하여 간화선풍을 드날렸다.
귀국 후 현재의 경기도 양평 소설산(小雪山)에서 정진하였으나, 공민왕의 간청으로 1356년 마침내 왕사가 되어 고려 불교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다. 보우 화상은 개경의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구산선문의 통합에 힘썼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고려 불교의 통합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고려의 오교 양종의 교단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게다가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책임까지도 언급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보우 화상의 구산선문 통합 작업이 적어도 당대 불교의 분열과 폐단을 일소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과 당시 승단의 폐해에 대한 깊숙한 논의를 주고 받았고, 이러한 폐해를 근절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교단 통합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보우 화상 스스로 정치 권력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개혁은 출발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지적하는 견해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후 보우 화상의 행보는 더욱 뚜렷하게 정치 권력화한다. 사승(邪僧)과 개혁승이라는 상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신돈과의 주도권 다툼 과정과 공민왕의 실각, 보우 화상 자신의 실각과 복귀 등은 오늘날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훌륭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 상황과 맞물린 행장과 오늘날 출가 승단 내에서의 논란으로 인해 보우 화상의 치열한 정진과 선풍마저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남긴 많은 시가 가운데 태고암가는 선시(禪詩)의 백미로 꼽힐 뿐만 아니라 그 고결한 수행 가풍을 짐작하게 하는 탁월한 가르침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 일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제6책, 682~683쪽에 실려 있다. 태고암가 등이 수록된 『태고화상어록』은 시자인 설서(雪栖) 스님이 편(編)한 것이다.

태고암가(太古庵歌)

내 머무는 이 암자 나도 알지 못하노라
깊고도 깊으며 울창한 나무들 사이 산중에 자리하였으나 막힌 곳이 없도다
하늘과 땅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맞물리어 앞뒤도 없으니
동서남북 사방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는도다

붉은 기둥 옥으로 올린 화려한 전각 마주서지 아니하였고
소실(少室: 달마 대사가 정진하던 토굴)의 청정한 가풍
내 따르지 아니하였으되
팔만 사천의 법문을 태워 파하였으니
구름을 벗어난 어느 청산이 푸르겠는가

산마루 흰 구름 희고 또 희며
산중 흐르는 맑은 샘물 방울져 떨어지니
흰 구름의 자태 그 누가 살필 줄 알겠는가
비 오다 개이고 번개가 울어대듯 떨어지는
샘물 소리 그 누가 알아듣겠는가
흐르는 샘물은 그저 천만 굽이 돌고 돌며 쉬지 않고 흐를 뿐이로다

한 생각 일기 전 이미 잘못되었거니
또 다시 입 열면 그대로 어지러울 뿐이로다
봄비와 가을 서리, 몇 해나 지났는가
아, 부질없이 오늘을 헤아리겠는가

맛이 있건 없건 그저 먹으며
누구든 제 마음가는 대로 먹도록 두는도다
운문의 떡이거나 조주의 차1)라 해도
이 암자 맛없는 음식만 하겠는가

본래 그러한 옛 가풍
누가 있어 그대와 그 기특함을 논하겠는가
한 가닥 털 끝 위의 태고암
넓어도 느슨하지 아니하고 좁아도 궁하지 아니하네
한량없이 많은 세계 그 가운데 들었으며
신묘한 그 경계 하늘을 찌를 듯 드높으니
삼세 여래 부처님도 알지 못하고
역대 조사들도 벗어나지 못하도다
어리석기 그지없고 말도 잘 못하는 암자의 주인공이여
내키는 대로 행하니 도리에 따르는 바가 전혀 없네
청주(淸州) 의 다 헤진 베옷 입고
등나무 그늘 가운데 절벽을 기대어 있도다

눈 앞에는 법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아침 저녁으로 그저 푸른 산을 대할 뿐이로다
멍하니 일 없이 이 노래를 읊노니
서쪽에서 온 가락이 더욱 확연하도다

광대한 우주에 그 누가 있어 내 노래에 화답하겠는가
영취산과 소실(少室)은 서로 부질없이 박수를 치는도다
아! 그 옛날 현 없는 가야금을 뉘라서 가져와
지금 구멍 없는 피리를 부는 내 곡조에 답하겠는가

태고암 가운데 옛 일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그 옛 일은 오직 지금 눈 앞에 밝게 드러나는도다
백 천 가지 삼매가 그 가운데 있어
인연에 응해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늘 고요하도다

이 암자는 늙은이만 머물지 않는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 조사들이 그 경지를 같이 하는도다
결정코 말하노니 그대 의심하지 말지어다
지혜나 알음알이로 헤아리기 어렵도다

주)
1) 원문은 운문호병조주차(雲門糊餠趙州茶)이다. 운문호병은 어떤 스님이 운문 선사에게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선사께서 “호병이니라.”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호병은 중국 떡으로 깨를 넣어 구은 떡을 가리킨다. 조주차는 조주 선사의 그 유명한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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