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傳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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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傳法)
  • 관리자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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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가려뽑은 경전말씀

오늘 중국 서안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지난 오월 초에 단신으로 출발하여 40여 일 동안 서안과 돈황을 비롯한 실크로드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낙양의 용문석굴과 소림사 등을 거쳐 돌아온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동안 마음을 기울여 연찬해 오던 중국 선종의 자취와 현장과 구마라집이 한역한 경전의 산실들, 십대 후반부터 동경해오던 돈황의 불교예술을 현장에서 참관하는 편력자의 기쁨도 누렸지만 전통의 수원(水源)이 고갈되어버리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필름과 유흥을 팔아 지탱해가는 현대 중국의 사원불교를 바라보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여정을 끝맺으면서 또 한 가닥의 길을 발견한다. 그것은 21세기 한·중·일 세 나라의 불교에서 그토록 많은 치욕과 모순의 역사를 견뎌오면서도 한국불교가 보존한 교학체계, 선수행의 전통은 오직 속도와 계수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현대동양의 반문명적인 혼돈 속에서 오직 홀로 존재하는, 최후의 순수한 증언자의 불교라는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고갈되어버린 현대 동양의 불교 교학과 선을 더욱 온전히 지켜가기 위한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내 나라 불교가 더 우월하다는 얄팍한 국수주의도 자만심도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불교의 성숙한 존속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한 불교인의 성찰이며 자각인 것이다. 불교의 법이 사라지는 것은 본래 악귀에 의해서도, 성문들이 그것을 감추어 버리기 때문도 아니다. 세상에 불법을 듣는 사람이 적어지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빈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법을 설하는 사람도 드물어지고 법을 듣지 않기 때문에 불신과 의혹은 더욱 커진다. 법을 아는 사람도 그것을 설하지 않고 물러나 숨어버릴 것이다.

『아촉불국경』 불교가 동양정신의 가장 지고한 차원으로 받아들여지던 한 때, 옛 동양에서는 국왕에서부터 초부에 이르기까지 불법을 듣고 부처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 한국, 중국 할 것 없이 불교교단은 세속사회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잦은 내홍과 금권을 둘러싼 소음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남아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불교는 곧 법의 존속을 염려해야 할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중국불교의 초전사찰, 낙양의 백마사 스님들은 관광객들이 종을 쳐보고 주는 돈 몇 푼을 받기 위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았고 소림사는 상징적인 달마의 사찰일 뿐 불교서적 한 권 내놓지 않고 살벌한 칼과 창을 파는 무술용품 가게로 가득 차 있고 이소룡이나 이연걸의 흉내를 내는 소년들이 “끼아악, 끼아악”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니는 무술학교로 변하고 말았다. 스님들이 관광객들에게 무술시범을 보이고 몇 푼씩 받는 비감한 광경도 보았다. 그토록 방대하고 깊은 사상적 성과를 낳은 중국불교 교단이 붕괴하고 유적만 남은 오늘 중국불교의 한 단면을 지켜보며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쓴 샤무엘 헌팅턴의 “불교는 동양의 거대종교이기는 하지만 거대문화로서의 생존에는 실패했다.”라는 독설이 내내 떠올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무리 방대하고 화려한 조직과 경제적 위세를 자랑하는 불교교단도 스스로를 지켜나가지 않으면, 법의 존속을 위해 정진하지 않으면 그렇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허망하게 붕괴되고 만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옛과 지금이 있으나 법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사람에게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으나 도에는 성함과 쇠함이 없나니 비록 부처님 당시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면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아무리 말법시대라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한다면 무엇을 근심하리요.

야운, 『자경문』 돈황에 7일 동안 머물며 막고굴을 참관했다. 막고굴의 서늘한 어둠 속에서 부처들, 보살들, 성문, 제자, 신자, 동물, 산천초목은 열반의 미소와 깊은 질감을 가진 색채 속에서 그 몽환과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호흡을 내쉬며 막고굴 앞의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나오던 어느 오후, 나는 백양나무 숲 속에서 우는 뻐꾹새 울음소리를 듣고 현기증을 느꼈다. 놀랍게도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한반도 남부의 산사에서 “뻐꾹 뻐꾹” 하며 우는 뻐꾹새 울음소리와 같았던 것이다. 그 새들은 수천 년 전부터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남녘의 산사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귀로 들으면 문(聞)이라고 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신(信)이라고 하며 받아들여서 버리지 않으면 수(受)라고 하며 수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면 지(持)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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