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주사 마애불 오르는 길에 만나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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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 마애불 오르는 길에 만나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 관리자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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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충북 제천 월악산(月岳山) 덕주사(德周寺)

“ 똑똑똑….”
별도 달도 없는 어둠 속, 오직 도량석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덩달아 잠을 깬 산새들이 저마다 도량석을 따라 나선다고 야단법석이다.
이른 새벽 새로 지어진 덕주사 대웅보전에 앉아 있자니 그 소리가 꽤 흥겨웁다. 100일이 넘은 가뭄 속, 그동안 미처 듣지 못했다면 오늘 이 청정한 도량석 소리에 비님도 그만 잠을 깨리란 생각이 간절하다.
두 분의 공양주 보살님과 주지 성태 스님의 새벽예불에는 예불문 소리가 따로 없다. 한 시간 남짓의 고요한 좌선과 산새소리가 예불문이 된다. 아니 스님은 매일 아침 도량석을 돌며 먼저 예불을 마치시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귀중한 시간만큼은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무언의 가르침으로 새벽 예불을 올린다.
덕주사(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043-653-1773)는 하늘과 땅의 서기를 서로 잇는다는 월악산 영봉의 중턱에 자리한 고찰이다. 태백에서 소백을 지나 내륙 깊숙이 뻗어내리던 백두대간이 잠시 멈추어 서서 숨(기운)을 고르고는 백두산 영봉을 쫓아 다시 한번 우(북)로 치솟으며 남북으로 놓여진 산이 바로 월악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 속에서는 월형산(月兄山)으로 불리운 모양이다. 이곳에서 신라 진평왕 9년(587) 창건되었다는 덕주사 역시 월형산 월악사(月岳寺)라고 불렸다는데 지금은 덕주공주의 애틋한 전설과 더불어 덕주사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 9년(935), 왕은 군신들을 불러모아 나라를 고려에 넘길 것을 의논한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천명에 있는 것이니, 충신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이를 의논함이 옳을 것이어늘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주는 것이 옳으리오.”
신라 경순왕 9년(935), 왕이 군신들을 불러모아 나라를 고려에 넘길 것을 의논하자 왕자(마의태자)가 올린 간곡한 만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순왕은 곧 항복의 글을 고려 태조에게 전했고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덕주사와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일행은 국권회복을 위해 강원도 금강산 한계산성으로 향한다. 길을 가던 중 월악산을 앞에 둔 계곡 깊은 곳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 날 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지어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의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잠에서 깨어난 마의태자는 이 신기한 꿈을 누이 덕주공주에게 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주 역시 같은 꿈을 꾸었다. 다음날 서쪽 고개를 넘은 일행은 그곳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마의태자는 석불입상이 세워진 미륵사에, 덕주공주는 마애불을 조성한 월형사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마의태자는 다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미륵입상 옆으로 난 하늘재를 넘어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나라 잃은 회한을 달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세간에는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태자의 얼굴을,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며 혹은 그 반대로 서로를 그리워한 까닭에 각각 서로의 모습을 조성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실제로 덕주사 마애불은 남향인 데 반해 미륵리 석불 입상은 특이하게도 마애불을 바라보듯 북향인 채로 조성되어 있어 옛 이야기의 여운을 더욱 증폭시켜준다.
현재 덕주사는 이 마애불 아래로 1.5km 떨어진 계곡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20여 년의 불사 끝에 최근 건립된 대웅보전은 그 오랜 시간만큼이나 정성 들인 손길이 역력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규모있게 지어진 대웅보전은 아직 단청을 입히지 않아 더욱 단아해보이는데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두고 조성된 삼존불의 모습 역시 단정하고 더없이 원만하다. 그래서일까. 108배, 삼배, 또 삼배가 자연스레 이어지는데 비를 머금었는지 새벽 공기가 시원하다.
중원 제일의 대찰이라는 옛 면모를 되찾기 위해 차근차근 불사를 진행 중인 덕주사에는 또 눈, 코, 입 등을 소박한 민중들에게 떼어준 약사여래입상과 쉬이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범문(梵文) ‘대불정능엄신주비(大佛頂楞嚴神呪碑)’가 소중하게 모셔져 있어 이채롭다.
각각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제천시 한수면 역리 정금사 터와 송계리 월광사지 입구 논둑에서 옮겨온 이 고려시대의 석물들은 월악산 주변의 융성했던 사찰들을 연구하자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덕주공주의 전설 깃든 마애불(보물 제406호)을 참배하러 오르는 길, 아름답기로 유명한 덕주사 계곡이라는데 가뭄 탓에 그 승경을 놓치고 말았다. ‘어서 빨리 비가 와야 할텐데….’ 간절한 마음 담아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께로 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민초들도 올랐으리라. 기울어가던 신라의 국권 회복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애불 가까이에도 덕주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나 일제가 조사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상·하 덕주사가 언급되고 있고, 1915년 제작된 『최근지충주(最近之忠州)』에도 우공탑을 앞에 둔 극락전 사진이 분명하니 말이다.
이 마애불의 덕주사는 묘향산의 절을 지은 목수가 지었다고 하는데 많은 목수들이 절의 건축공법을 알 수 없을 만큼 가람의 구조와 색채가 더없이 독특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극락전 터 앞 우공탑에 얽힌 전설 역시 이 장려한 건물을 소의 도움으로 지음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스럽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애불 앞 덕주사는 6·25전쟁 중 불태워지고, 지금 마애불 주변에는 조성연대가 불분명한 우공탑과 옛날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단 석축 등이 남아 있어, 굽어보이는 계곡 아래 선경과 함께 옛 덕주사의 웅장했을 모습을 짐작케 할 뿐이다.
14m에 이르는 거대한 부처님을 참배하고 내려서자니 저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섰을 미륵리 석불입상이 눈이 아른거린다.
덕주공주 역시 이곳에서 부처님 참배를 마치고는 멀리 미륵불을 내다보며 그 옆 하늘재를 넘어섰던 마의태자와 찬란했던 신라의 옛 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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