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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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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

중생과 부처의 경계가 둘이 아니니…

김충현 옮김의상(義湘) 대사: 625~702의상 대사는 원효, 자장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분이다.

우리들에게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와 화엄 십찰(華嚴十刹)의 창건주로, 해동 화엄의 초조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는 624년 한신(韓信)의 아들로 태어났고 속성은 김씨이다. 스물아홉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고, 중국 당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智儼)에게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에는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옥천사 등의 화엄십찰을 창건하였다. 668년 『법계도』를 저술했고, 702년 입적했다. 『삼국유사』에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의상은 부처님의 화신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에 전해진 내용으로, 선묘(善妙) 낭자와의 인연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당에 유학할 당시 대사를 사모한 낭자가 귀국 길에 용이 되어 대사를 보호했고,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도 대사를 도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대사는 영주 부석사에서 낭자의 도움으로 최초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대사를 부석 대사(浮石大師)라고도 부른다. 또한 원효 성사와의 유학길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석사비(浮石寺碑)와 『유사』에는 650년 26세에 처음으로 중국으로 떠났고, 요동에서 정탐자로 오인받아 잡혔다가 수십 일 만에 빠져 나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유학길은 661년 37세로, 양주(楊洲)에 도착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사는 또한 당시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이 성을 과도하게 지어 백성의 고초가 크자, 정책을 바꾸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문무왕은 성 짓는 것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대사는 해동 10성(聖)의 한 분으로 추앙받았다. 원효, 자장과 함께 해동 불교의 전성기를 열어 간 분이 의상 대사였다.

화엄일승법계도

법성은 원융하여 이상(二相)이 없으며(법성은 분별하지 않음을 상으로 삼는 까닭에 차별하는 상이 없으며)2)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아 본래 고요하도다(중생인 나의 몸은 있는 그대로 진리의 몸인 법신인 까닭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하도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모든 것이 끊어진 경계로서(일체의 언설을 뛰어넘고 차별하여 아는 상 또한 끊어진 경계로서)

깨달아 아는 것이요 미혹함이 남음이 없는 경계요(연기로 이루어지는 중생의 세계나 본래의 자리 또한 부처님의 세계인 것이다)

진성은 매우 깊고 미묘해(본래 중생의 참다운 성품인 불성은 매우 깊고 미묘해)

자성을 고집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는도다(스스로의 성품에 집착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본래 공한 그 참된 성품을 깨달아 아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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