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날으는 학은 본래 자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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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날으는 학은 본래 자취가 없다
  • 관리자
  • 승인 2007.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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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 추모 법어

허공을 날으는 학은 자취가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모래 위를 날으는 갈매기는 날아간 뒤에 자취를 남겨 두는 겁니다. 그 자취가 있든 없든 간에 본래 없는 자취예요. 허공에 있는 학의 자취도 본래 없는 것이고 모래 위의 갈매기의 흔적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고 죽어서 거래(去來)한다는 것도 그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오늘 불광법회에 왔다가 가는 이것은 육체가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우리의 본래의 자리,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하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고 가고 나고 죽는, 거래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두 종류의 몸, 두 가지의 마음, 두 개의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히 두 종류의 끝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색신(육체)을 알고 육안(눈)을 알고 지각하고 분별하고 계교하는 마음(인식)을 알고 있는데 혜안이 있는 줄은 모르고 발견도 못한 이가 많습니다. 또 육신이 아닌 법신(法身)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과 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경』에 보면 ‘나의 이 육신이 그대로가 법신’이라고 하는 부처님 말씀에 따른다면 이 살아 있는 육신 그대로가 부처인 줄 알아야 되고 또 분별하고 지각하는 망상심이 그대로가 불심이지 따로 불심이 없는 겁니다. 눈도 마찬가지, 육안을 내놓고 따로 혜안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금강경』을 보신 분은 아마 아실 겁니다. 부처님과 사리불 존자가 대화하기를 “중생은 육안만 알고 육안만 인정하지만 부처님의 눈에는 육안, 혜안, 법안, 천안 등 다섯 가지가 다 있는 불안(佛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섯 가지를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광덕 스님께서는 용성 대종사의 대각 사상 현창을 위해서 대각 재단을 창립하시고 또 30대 젊은 시절부터, 종단 사무에도 헌신하셨는데 투철한 혜안이 있어서 총무원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을 참 많이 하셨어요. 그뿐만이 아니고 미래 한국 불교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가 젊어져야 한다시며 불광법회를 시작해서 지금껏 이끌어 오셔서 이 자리에 불광법회, 불광사가 생기고 백년 이백년을 내다보시고 전법해 오셨습니다.

강남 불교의 개척을 하신 분이 바로 광덕 스님이십니다. 이렇게 포교를 위해서 헌신하시고 잡지를 통해서 어디서든 부처님의 법음을 스스로 받아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광덕 스님께서는 근대 한국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처님 법을 전하는 거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의 몸을 평상으로 만들어 삼천 대천 세계에 두루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더라도, 또는 부처님을 이마에 이고 평생 모신다고 하더라도 불법을 수지하고 전하고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경을 수지하고 가까이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훈습이 돼서, 물이 들어서 부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 신심이 생깁니다. 그 신심을 발보리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리심이란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무슨 경이든지 다만 한 가지만 잘 모셔도 됩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많은 천인, 천왕, 팔만 사천 금강 신장이 법문을 듣고 “앞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경을 모신 장소를 호위하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신봉하는 불제자가 있는 곳을 우리가 옹호하겠습니다.”하고 서원을 하고 물러간 것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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