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정치인과 저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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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치인과 저런 정치인
  • 관리자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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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 정치권이 꿈틀거리고 있다. 으레껏 또 그런 철이 돌아왔는가 하고 유권자들은 심상하게 그런저런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부산, 제주의 후보 경선들에서 전 시장, 전 의원들이 현역들을 눌렀다느니, 노동계의 기초장, 광역의원 공천 할당 요구에 여당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느니, 거야(巨野) 의원 영입과 단체장 공천 문제로 '여-야 공조'에 난기류가 감돌고 있다느니, 또한 노조에 선거운동을 허용하게 됐다느니, 심지어 누구누구는 새 선거법의 피해자라느니, 6월 지방선거를 두고 자질구레한 여러 설이 신문지면을 메우고 있지만, 태반의 유권자들은 그렇게 자발이나 떨어대는 언론까지 싸잡아서 먼 동네 일처럼 강 건너 불 쳐다보듯이 그저 멍멍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또 이렇게 노상 저 잘난 맛으로만 사는 데 길들여진 몇몇들 끼리끼리 서로 핏대를 세우고 악악대며 야단법석을 치며 '한철' 지나가나 보다 하고.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주기적으로 한번씩 닥치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둘러싼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이 점을 한번 천착해보자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표이다.

요컨대 이 문제의 근본은 새삼 거론하기조차 쑥스러운 일이지만, 어느 누가 정치를 결정하는냐, 어느 누가 정치 한가운데 나서서 우리 모두의 살림을 좌지우지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이고, 바로 이것은 인류역사 고대 이래 정치학의 근본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 동양에서도 왕도정치니, 패도정치니 하는 것들이 모두 그 문제를 둘러싼 논의들이었고, 고대 희랍에서도 플라톤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해낼 합당한 사람으로 '철인왕(哲人王)을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집단적인 의회'를 들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시작 되었던 주민투표라는 것은 바로 '민의'의 소재를 밝히자는 것이었는데, 이 투표의 '실제 내실'을 둘러싸고는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대표적으로 보이듯이 목불인견의 경지에까지 와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기왕에 오랜 세월 익숙해져 온 정당정치라나 관련 '법'이라나 하는 것들의 큰 '틀'에 잠겨든채, 응당 해야 할 만한 소리는 누구 하나 하지 못하고 있다. 너무너무 뻔한 소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가 대강대강은 다 알고 있는 너무너무 상식적인 소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의 오늘의 어려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너무너무 뻔한 상식의 세계로 일단 돌아오는 점이 아닐까. 우리 정치권의 현 국면은 그 지경으로 본래의 상식 선에서 너무너무 멀리 벗어져 나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몇몇 당사자들만이 기왕의 '정당구도'라나 '공천'이라나 하는 것을 등에 업고 관련 법이라나 뭐라나 하는 테두리 내에서 기왕에 뛰던 버릇대로 들입다 뛰고 있을 뿐, 정작 태반의 유권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하고 있는 국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차마 말을 못꺼낼 정도로 사실은 우리 정치는 구조적으로 깊이깊이 병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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