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실업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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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실업자의 하루
  • 관리자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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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오늘도 민호씨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백화점이 문을 열기 한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어쩐 일인지 선착순 200명은 이미 마감이었다. 담당 여직원에게 물으니 그녀는 참 딱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새벽 4시 반부터 줄을 서니까 조금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내 결혼반지를 들고 나온 꼴도 그야말로 속이 쓰리고 낯이 더운 판인데 새벽 4시 반에 나와 줄을 서야 한다고.....

민호 씨는 어제처럼 백화점을 뒤로 하고 터덜터덜 걸었다. 마치 데이트 신청에 연거푸 바람맞은 노총각 심정이었다. 국제통화기금 한파로 금 모아 수출하기 운동이 한바탕 지나가자 이번에는 몇몇기업에서 다이아몬드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금 모으기 때 아내 예물은 물론이거니와 딸애의 백일, 돌 반지도 모두 팔아먹은 민호 씨는 이번엔 아내의 결혼반지를 들고 나왔다. 물론 몰래 가져나온 건 아니고 아내가 스스로 내놓은 것이었다 3부부터 팔 수 있다는데 아내의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다행히 딱 3부였다.

오죽 못났으면 아내의 결혼반지를 들고 나오냐고 탓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민호 씨로선 단 몇 만원이 급한 형편이었다. 통장 잔고는 이제 완전히 바닥이었다. 아닌 말로 이 달 목구멍 풀칠도 힘겨운 판이었던 것이다.

잔뜩 우그린 표정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걷자니 갑자기 한 여자가 민호 씨를 막아 섰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얼굴 빛이 영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무슨 걱정 있으세요?"

이게 무슨 소리지 아는 여잔가. 민호 씨는 당황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도에 관심 있으세요?" 민호씨는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종로에서 몇 번인가 같은 경우를 당해 보아 그 여자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던 것이다. 민호씨는 갑자기 화가 치솟아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꾹 참았다. 하기야 이 여자가 무슨 죄인가. 오히려 이 여자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 했던 것 뿐인데, 시절 인연이 어수선한 게 탓이라면 탓이겠지.

민호씨는 여자에게 손사래를 치며 지하철역으로 도망치듯 달렸다. 도보다는 돈에 관심이 있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잠깐 머리에 스쳤다. 지하철역에 막 들어서려는데 호출기가 부르르 떨렸다. 확인해 보니 이전에 다니던 출판사에서 온 것이었다.

민호 씨는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경리 미스 리가 곧 사장을 연결해 주었다.

"어, 이과장 뭐 해? 지금 짐 싸고 있는데...."

민호씨는 아차, 했다. 오늘이 바로 출판사의 이삿날이었던 것이다. 민호 씨가 다니던 아시아 출판사는 경제 한파에 엮인데다 커다란 도매상이 서너 곳이나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결국 사무실을 좁혀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다. 넉 달 전 민호씨가 그만둘 때 도 마찬가지로 사정이 안 좋아 퇴직금도 지급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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