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 용, 왕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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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 용, 왕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 조경철
  • 승인 2023.11.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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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신화 속 용
고구려 고분벽화 강서대묘 사신도 중 청룡. 사진 ICOMOS 한국위원회

사신도 속의 용

사람이 동물과 함께 살아온 시기는 아주 오래됐다. 지금은 개와 고양이가 반려동물이라고 하여 사람과 어울려 살고 있다. 그런데 동물 중에는 상상 속 동물들도 많다. 때론 그런 동물들이 더 사랑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 역시 백호를 제외하고 모두 상상 속 동물이다. 사신도에는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남쪽에 주작, 북쪽에 현무가 있다. 

사신은 수호신의 역할을 하기에 무덤 속뿐만 아니라 궁궐 등의 사(四)대문에도 그려진다. 물론 처음부터 사신이 다 갖춰졌던 것은 아니다. 용과 범이 먼저 등장했고 이는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중국 하남성 유적에서는 죽은 유골의 좌우에 조개껍질로 형상화한 용과 범을 배치했다. 유골의 왼쪽에는 용, 오른쪽에는 범이니 말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의 등장이다. 중국 한나라 청동 거울에는 용과 범이 동서뿐만 아니라 사방(四方)에 거하면서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고 했다.

이 가운데 용은 사람의 일생과 밀접하게 관련됐다. 용은 상상의 동물 가운데 으뜸이기 때문에 주로 왕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왕은 용과 일생을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의 얼굴은 ‘용안’, 왕이 앉는 의자는 ‘용상’, 왕이 입는 옷은 ‘용포’라 불렀다. 어떤 경우 왕은 용의 아들이기도 했고 용의 후손이기도 했다.

 

용, 왕의 탄생

용의 아들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 백제의 무왕(武王, 재위 600~641)이다. 백제 무왕의 어머니는 연못가에 집을 짓고 혼자 살았다. 연못의 용, 즉 지룡(池龍)과 관계해 낳은 아들이 서동이다.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마침내 백제 제30대 무왕이 된다. 최근 미륵사터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등장해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고려 대량원군(훗날 현종)은 좀 특별한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태조 왕건이고 할머니는 신라의 왕족이다. 아버지는 왕욱이고 어머니는 경종의 왕비였던 헌애왕후다. 헌애왕후가 왕욱과 사통해 낳은 아들이 대량원군이다. 헌애왕후의 언니도 경종의 왕비였던 천추태후였는데 그녀에게도 사통한 아들이 있었다. 천추태후는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대량원군을 죽이고자 했다. 

대량원군은 여러 사찰로 피해 다녔는데 그 가운데 한 절이 지금의 진관사다. 대량원군이 머물렀던 절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떠돌아다녔다. 하루는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별이 갑자기 용으로 변한 다음, 다시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 사람들은 절에 머무는 대량원군이 용이라 생각했고 나중에 왕이 될 징조라고 수군거렸다. 대량원군은 출생에 문제가 있었지만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듯하다.

고려 현종이 용이라고 생각하게 된 연원은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까지 소급된다. 작제건은 서해를 건너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가던 도중 용왕의 부탁을 받고 여우가 변신한 치성광여래를 활로 쏘아 죽였다. 용왕은 자기 딸과 작제건을 혼인시켰다. 용녀가 왕륭을 낳았고 왕륭은 왕건을 낳았다. 왕건은 용녀의 손자가 된다. 용녀의 손자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되었고 이후 고려왕은 용의 후손이라는 ‘용손의식(龍孫意識)’이 생겨났다.
무신정권의 이의민이 한때 왕이 되려고 퍼뜨린 참언이 ‘용손십이진 갱유십팔자(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였다. ‘용의 자손은 12대에 끊어지고 다시 이씨(李氏, 十+八+子)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참언이다. ‘용손십이진’이란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고려 왕씨의 용손의식은 강했다. 고려 말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란 소문이 퍼지면서 용손의식의 약화를 가져왔다. 용손의식의 약화는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  

 

고려 중기의 문신 허재(許載, 1062~1144)의 석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석관에 외부에 청룡이 새겨졌다. 

용, 왕의 죽음

용은 왕의 죽음과도 함께했다. 왕이 능에 묻힐 때 현실(玄室)의 사방 벽에는 시신을 보호하는 동물로 사신을 배치하는데 동쪽이 청룡이다. 고구려 강서대묘의 청룡이 가장 유명하다. 

사신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송산리 왕릉원이나 능산리 왕릉원의 무덤에도 보인다. 물론 왕이나 왕족이 아니어도 무덤에 사신을 배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시신을 안치한 석곽의 바깥에 청룡을 비롯한 사신을 새겨 넣기도 했다.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고 반대로 죽은 사람을 태워 하늘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늘나라 해모수가 유화부인을 만날 때 그가 타고 온 수레는 5마리의 용이 이끌었다고 하는 오룡거(五龍車)였다.

고구려를 세운 추모(주몽)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보냈다. 추모는 용의 머리를 디디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청룡은 보통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지만 ‘동쪽’에 치우쳐 있다. 황룡은 중앙의 용을 말한다. 황룡은 청룡을 포함한 동서남북까지 아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용이 왕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특히 황룡은 천하를 다스리는 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죽음이 용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의상 스님이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스님을 사모하는 선묘낭자가 있었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할 때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의 몸은 용으로 변해 의상이 타고 가던 배를 호위해 줬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의상이 세운 부석사의 선묘각에는 선묘낭자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용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

어떤 인물의 탄생에 가장 극적으로 연결된 용의 이야기는 알영부인의 탄생 이야기다.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 가야의 수로왕 등 모두 탄생신화를 갖고 있는데 공통점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여성 탄생신화는 단군신화의 웅녀와 신라 알영의 탄생신화다.

알영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중요한 것은 탄생신화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알영(閼英)은 우물(알영정閼英井)에 사는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우물 이름에서 따온 이름인 셈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지만 알영 이전까지 왕의 탄생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부분 알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알영은 왕비였지만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용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 옆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석가모니는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용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신비로운 일인데 석가처럼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당시 알영에 대한 신라인의 평가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 오른쪽 옆구리 탄생신화는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알영은 우물가에 태어났다’, ‘알영은 우물에 사는 용의 배를 가르고 태어났다’로 출발한 알영신화가 오른쪽 옆구리 신화로 확장되게 된 때는 불교 수용 이후가 된다. 

 

경주 첨성대(국보). 사진 불광미디어

선덕여왕과 첨성대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이후 진흥왕 등 여러 왕이 있었지만, 최초의 여성왕인 선덕여왕 때 알영의 옆구리 탄생신화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도 많았다.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고, 선덕여왕 입장에서는 여성도 통치할 수 있다는 정당성이 필요했다. 

그때 주목한 인물이 알영부인이었다. 선덕여왕은 박혁거세와 함께 신라를 세운 알영부인이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날 만큼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위대한 신라의 출발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에 의해 이뤄졌고, 알영부인의 후손이 신라를 다스리는 것이라는 상징체계를 만들었다.

우물은 사람과 일생을 함께한다. 우물은 사람에게 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생명과 같은 존재다. 우물이 맑으면 ‘삶’이고 우물 색이 변하면 ‘죽음’이다.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 가운데 하나가 우물 빛이 핏빛이 됐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물에 신령스러운 용이 산다고 생각했다. 알영이 태어난 용도 알영이라는 우물에 사는 용이었다.

그럼 어떻게 용은 우물에 살고 있을까. 우물에 산다기보다 우물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바다의 용이 육지로 나올 때 이용하는 통로가 우물인 셈이다.

신라 선덕여왕이 세운 분황사에도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은 보통 우물이 아니고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사는 우물이다. 다른 나라에서 신라를 쳐들어오기 위해 마술사를 보내 분황사 용을 물고기로 변화시켜 잡아갔다고 한다. 급히 사람을 보내 이들을 잡아들였고 어항 속의 물고기를 풀어줬더니 다시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첨성대로 눈길을 돌려보자. 첨성대가 천문대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고 첨성대의 생김새에 주목해 보자. ‘너무 낮다’라는 이유로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첨성대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천문대다. 당시 하늘이 맑았기에 첨성대가 낮아도 하늘을 관측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높이가 너무 높고, 모양도 특이해 관측하기에 편리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높고 특이한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먼저 특별히 고려해 둘 사항은 알영부인의 탄생신화를 만들어 낸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첨성대의 모양에 대해선 여러 말이 있지만, 우물 모양이라는 점에 대해선 대체로 일치한다. 당시 사람들은 우물 속에 용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첨성대의 중간 옆구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다.

필자는 ‘알영이란 우물에 사는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의 탄생신화를 구조물로 상징화시킨 것이 첨성대라고 생각한다. 첨성대는 신라가 알영부인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 후손인 선덕여왕이 바로 신라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오늘도 용은 첨성대와 함께 바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조경철
연세대 사학과 객원교수,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이 조사한 한국사 분야 학술지 인용지수 2위를 차지했다. 저서로는 『백제불교사연구』, 『나만의 한국사』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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