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입니다.”
2014년 『정선 디가 니까야』를 시작으로, 2016년 『정선 맛지마 니까야』, 2021년 『정선 쌍윳따 니까야』, 마지막으로 2023년 『정선 앙굿따라 니까야』를 완간한 소감을 묻자 나온 대답이다. ‘정선 니까야 시리즈’는 불교의 초기 경전인 ‘니까야’에서 중요 구절을 선별해 발간한 책이다.
이중표 교수가 정년 퇴임할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전남대에서 30년 넘는 기간을 불교철학을 강의하고, 학교에서 벗어날 때 ‘이제 자유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 자유가 못다 한 니까야 번역이었다. 정년이 오기 전에 마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번역이 퇴임하고 5년 지나 끝났다.
예상보다 조금 늦게 완간됐다. 그사이 ‘붓다나라’라는 신행단체로 새로운 불교운동도 시작했다.
“저는 불상 중심의 불교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상에서 불교 경전으로 불교의 신앙 형태가 바뀌어야 해요. 부처님 말씀이 기록된 경전은 도외시하면서 산 정상에 있는 불상으로 가거나, 또 어떤 이는 명상으로 가고 있어요.”
아함의 중도체계
이중표라는 이름 석 자의 시작은, 불광출판사에서 발간한 박사학위 책 『아함의 중도체계』다. 빨리어로 된 불교의 초기 경전인 ‘니까야’의 주요 개념으로 불교를 해석한 책이다. 아무래도 ‘정선 니까야 시리즈’의 토대가 됐을 법하기도 하다.
“빨리어 문헌은 부처님 원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죠. 경전을 읽을 때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과거칠불이나 윤회같이 신앙을 강조하는 것과 오온(五蘊), 육입처(六入處), 육근(六根) 같은 교리적 개념들이죠. 당연히 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주요 개념을 번역할 때, ‘전체 체계를 오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은 특별히 선별했다.
“부처님이 지옥, 윤회와 같은 말씀은 하셨지만, 경전에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윤회’는 당시 인도인들 사고의 기본 바탕입니다. 부처님이 윤회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를 되새겨봐야 합니다. 윤회는 ‘소용돌이’입니다.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라는 말씀이죠.
또 아비달마 체계를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보다 보면 오해할 수 있는 글들이 있습니다. 애매하게 처리되는 번역, 기존 번역 중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은 일부러 넣었습니다.”
연구년 휴식으로 2007년 미국에 있을 때,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미국 지식 계층에서는 명상과 불교를 모르면 식자층 대접을 못 받는 분위기였다고. 그런데 미국의 불교는 티베트불교, 태국불교, 틱낫한 스님 중심이었다. ‘이곳에도 부처님의 말씀과 깨달음이 정확히 전달될 필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번역한 것이 ‘디가 니까야’인데 5년 걸렸어요. 양도 많은 편이지만, 부처님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경전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인도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이 나옵니다. 오히려 그런 단어가 번역하기 힘들어요(웃음).”
번역 중간에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니까야로 해설하는 책도 발간했고, 『숫따니빠다』 『담마빠다』도 번역했다. 『불교와 양자역학』 『불교와 일반 시스템이론』 같은 외국 서적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불교에 미친 고등학생 그리고 ‘출가’
이중표 교수가 불교를, 그것도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고민하기까지 학담 스님, 우화 스님, 상인 스님, 고익진 교수 등 대여섯 명과의 인연이 등장한다. 학담 스님은 고등학교 2년 선배인데, 화순에서 광주로 오가는 통학 기차가 인연이 됐다. 스님을 따라 불교와 첫 인연을 맺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광주고등학생불교학생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광주제일고에만 150명이 가입했고, 광주지역 전체 고등학교에는 불교학생회가 만들어졌다. 창립을 주도했기에 3학년 진급을 1년 미루면서 활동했다. 불교에 미쳐 고등학교를 4년 다닌 셈이다. 본인을 ‘사고뭉치 덩어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서울대에 입학한 학담 스님이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니 서울대 법대까지 가서 왜 출가했을까?’ 생각했죠. 만나려고 경주 분황사까지 갔지만 못 만났어요. 꼭 만나야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길로 나주 다보사로 출가했다. 그곳에는 평생을 걸쳐 선(禪)과 농사만 지은 우화 스님이 계셨다.
“스님이 ‘이 절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데, 있고 싶으면 먹을 것을 가져오든지’ 하셨죠. 듣자마자 쌀 한 가마니를 지고 올라갔죠. 스님이 ‘진짜 중이 되려나 보네’ 하면서 받아주셨습니다.”
‘무(無)’ 자 화두를 던져주신 우화 스님은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하루는 “광주에 무등산이 있지? 무등산이 먼저 생겼을까, 네가 먼저 생겼을까?” 같은 이야기도 전했다. 그곳에서 남다른 체험도 했다.
우화 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만 몇 개월 하고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하자마자 광주 관음사의 상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승복을 입고 전남대 철학과를 다녔다.
스승 고익진
고익진 선생을 만난 것도 관음사였다. 은사인 상인 스님은 불교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분이고, 방학 때면 동국대 교수님을 모시고 관음사에서 강의를 열었다.
“고익진 교수님의 강의가 남달랐죠. 한참을 교수님의 석사학위 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로 공부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와 보니, 선생님이 광주 어느 절에 머물고 계신 거예요. 제가 출가 상태였기에, 그 절에서 목탁 치면서 선생님을 모셨죠.”
당시 고익진 교수는 서울 생활을 접고,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서울 동국대로 돌아가는데, “같이 가서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다.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전서’를 편집하는 역할을 고익진 교수가 맡게 된 상황이었다. 그길로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저녁마다 토론했죠. 저는 교수님 논문을 갖고 불교 공부에 눈뜬 셈이에요. 불교를 공부하려면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더라고요. 선생님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으니, 문법책 한 권을 주시더라고요. 꼬불꼬불한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로 돼 있는 건데, 꽤 고생했습니다.”
2년여를 한집에 살면서 시봉했다. 그렇게 광주에서, 서울에서 몇 년을 고익진 교수와 함께했다. 그즈음 결혼도 하게 됐고, 1982년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함경의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고, 빨리어도 공부했습니다. 고익진 선생님은 ‘진속(眞俗)’이라는 체계로 불교를 말씀하셨는데, 다른 길도 보이더라고요. ‘명사’적 사유에서 ‘동사’적 사유로 불교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철학적 체계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죠. 석사학위를 『백론(百論)』을 주제로 했는데, 중관사상(中觀思想)으로 초기불교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불교 운동 ‘붓다나라’
그렇게 공부하면서 1980년대 후반 박사학위를 받았고, 전남대에 자리 잡게 됐다. 이중표 교수는 학위를 준비할 때나, 교수로 재직할 때나 새로운 불교 운동을 꿈꿨다. 젊을 때는 서울에서 후배들과 포교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불교성전’을 편집하기 위해 학위를 미루기도 했다. 퇴임 후, 미뤘던 꿈을 신행공동체 ‘붓다나라’를 통해 펼치고 있다.
“경전을 번역하는 것도, 붓다나라를 시작한 것도 미래 불교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불교 운동을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를 신비주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철학적 개념과 주제로 불교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대 상황에 맞는 것이고, 그것만이 한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붓다나라는 강의와 토론 중심으로 불교를 공부한다. 700여 명 정도가 동참하고 200명 넘는 정회원이 있다. 니까야 번역이라는 1차 과업을 마쳤으니 앞으로의 방향을 물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니까야 정선 시리즈’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으로 나가야죠. 불상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의 신앙 형태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즈음 많은 분이 관심 두는 명상만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을 향한 길인가?’라는 물음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입각한 선정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노년의 학자는 이렇게 한국불교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선 니까야 시리즈』 4권 모두 불광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불교의 초기 경전은 빨리어로 전해지는 ‘니까야’ 4부(部)와 한문으로 전해지는 ‘아함경’ 5부가 있다. 빨리어는 부처님이 구사한 언어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다. 각각의 ‘니까야’가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에, 내용을 선별해 『정선 니까야 시리즈』를 발간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