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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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의미
  • 관리자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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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항상 서운사에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기라도 하듯이 내가 미쳐 느끼기도 전에 먼저 알고, 관세음보살님처럼 슬쩍 나타나서는 아상(我相) 한 번 내지 않고 도움을 주는 대원심 보살님 이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 영가를 부처님 곁에 모셨다.
친구의 종교가 무교인데다가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 이미 친구로서의 예의를 다했지만 그래도 49재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보살님 인지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때마침 법당일을 책임지고 있던 수진 스님이 한국을 나가기 얼마 전이라서 노보살님의 제사 는 전적으로 내가 맡아야만 했다. 솔직히 조금은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염불에 자신이 없었 던 것은 물론이고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형식으로 잘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에 보살님과 약속했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하기로. 아직 세상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 탓인지 규칙적인 제사의식보다는 그냥 내 나름의 모양으로 다가서고 싶고 기도하고 싶었다.
비록 생전의 모습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와 인연된 한 영가의 지난 삶들을 그려보면 서 그를 통해 생의 교훈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향과 잔을 올리고 촛불을 밝히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 침을 영가와 함께 생각하고자 했다. 삶은 고구마도 올리고 사탕도 올리고 내가 그냥 대접하 고 싶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공양했다.
가끔은 부처님께 올렸던 초를 대접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를 빌었고 지장보살님께 밝혔던 촛불로 저승길을 밝혀 내생에는 보다 복되고 행복하게 태어나기를 빌었다. 신장님전의 촛불 로는 나쁘고 삿된 기운의 침입을 막고 무사히 자신의 윤회 길을 완성하기를 빌었다. 때로 장시간 외출할 때면 화지의 위험 때문에 촛불을 밝힐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지장주력 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영가와 나와의 인연을 감사하면서 금강경 사경 한 편을 선물했다.
49재 전날에는 대원심 보살님이 일부러 한국 제과점에서 샀다면서 케이크와 빵을 공양했고 수퍼에서 몇 가지 과일들을 사다 올렸다. 그리고 멀리서 꽃공양도 있엇다. 워낙 조그마한 법당이라 금방 풍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웬지 마음 한구석 이 허진하고 섭섭한 마음이 일어났다. 어쩐지 떡 대신에 케이크를 구워올리기로 한 것이 못 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늦은 시간에 이리저리 전화 끝에 얻어낸 떡집에 시루떡과 인절미를 맞추고 다음날 오전에 서로 한 시간씩 운전하는 중간거리에서 만나기로 하고서야 편안히 잠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루떡과 인절미를 가지러 가는 길에 한국 가게에 들러서 배 한상자를 사서 함 께 재삿상을 차렸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내 마음은 여진히 뭔가가 불편했다.
제사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나는 고구마 전부침을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제사음식을 해 본 경험이 없을뿐더러 고구마 부침 또한 처음이었다. 게다가 우리 서운사에서는 제사음식을 모두 집에서 직접 해오시기 때문에 내가 제사음식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고구마전을 그렇게 잘 부치는지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봐도 먹음직스럽게 잘 부쳐진 고구마 부침은 금륜성보살님이 정성스럽게 만든 깔끔하고 정갈한 나물들과 너무나 잘 어울 렸다. 그리고 나는 만족함을 느꼈다.
노보살님의 49내는 날마다 새벽 출근길에 향과 초를 올렸던 천수 보살님이 학교를 빠지고 참석하시겠다는 바람에 오후시간에 지냈다.
제법 어둑해질 무렵에 속옷가지와 금강경을 소전하면서 그동안 좀더 정성껏 잘 모실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서운함에 젖은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천수 보살님은 살그머니 다가와서 하는 말이 타오르는 향연기 속에서 함빡 미소를 머금은 노보살님의 모습을 보았노 라고 했다.
나는 얌전하게 사그라드는 불길 속에서 외로웠던 한 영혼의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켜 보면 서 내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이제 노보살님이 가신 지도 3일이 지났다. 천수 보살님은 웬지 허전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 다. 아닌게 아니라 빈 영단을 쳐다보면 아직은 그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 그의 영혼은 너무 나 조용히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분명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리고 좀더 정성을 들였더라면 하는 후회가 마음 한 구석에서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대원심 보살님의 전화를받았다. 뉴욕에 있는 노보살님의 따님과 통화하던 중 스님이 고구마 부침을 공양했다고 했더니 까마득히 잊어버린 과거기억을 되살리며 노보 살님이 살아생전에 고구마 부침을 가장 좋아했고 그 다음이 떡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 국으로 이민 온 후 몇 십 년간 한 번도 잡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부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나의 부족함을 편안히 받아준 노보살님의 극락왕생을 다시 한 번 빌었다.
우리 서운사 신도분들은 누구나 영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으면 향과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순간 머지않아 있을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워 하기 보다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현재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려는 새로운 의지 를 일으킨다.
그들은 적어도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체득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도 가장 바르게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과 영혼은 잡귀나 우상이 아니라 평소에 지은 업따라 새몸을 받는 자연과 우주의 신성한 원리 그 자체임을 안다.
그들은 자신보다 한 발 먼저간 영혼들을 공경하고 가식 없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함으로써 삶의 수고로움과 고통으로부터 상당한 평화를 체험한다. 그들은 결코 세상사는 기술과 지식 으로 영혼과 만나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영단에 올리는 향이나 공양물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앞으로 있을 자신들의 죽음을 간접 체험하면서 삶과 죽음 너머에 있는 또다른 세계를 느낀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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