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겨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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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겨울 그림자
  • 허진석
  • 승인 2019.02.07 14: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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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두 아이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내가 잠에 떨어지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예를 들면 피치 못 할 자리에서 과음을 해 집에 돌아와서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할 때.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자기 일을 하며 산다. 네 식구가 함께 밥을 먹기는 쉽지 않다.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할 뿐 부모와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2층집에 산다. 위층을 우리 부부가, 아래층을 아이들이 사용한다. 두 층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아이들은 늦은 밤에 저희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 자란 우리를 왜 믿지 못 하나’, ‘왜 감시를 하나’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행히 그렇게 모진 아이들은 아니어서 자주 ‘걱정하지 말고 주무시라’고 권한다. 나도 아이들이 고맙게 생각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아이들이 모두 들어온 다음 크고 작은 문을 잠그고 마지막 전등을 꺼야 잠들 수 있다. 이는 내 마음이 이끄는 일이다. 누구의 강요도 법으로 정한 일도 아니다. 내가 지켜야 할 생활의 윤리, 아이들을 향한 부모된 도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이 도리라는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물론 누군가를 반드시 이해시켜야 할 일도 아니다. 내 도리와 윤리란 아마도 학습되었으리라. 나를 학습시킨 교사를 꼽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동 안 줄곧 아들을 기다렸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내버스 통학을 했다. 건설 회사를 운영한 아버지가 현장과 가까운 곳에 새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곧바로 집에 가는 착한 소년이 아니었다. 운동을 하거나 만화를 보거나 모아둔 돈을 털어 영화를 보았다. 싸움도 잦았다.

집에 갈 때는 흙투성이 교복에 땀범벅이 되었다. 허기지고 허탈한 마음으로 버스 안에서 흔들 거리다가 마을 어귀 정류장에 내리면,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도 아버지가 나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키가 190cm를 훌쩍 넘는 거인이었다.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불치의 병을 진단받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접고 투병생활을 했다. 혹독한 시간이었다.지나치게 야위어서 큰 키가 불편해 보일 정도로 몸이 상했다. 그 몸으로 매일 버스 정 류장에 나가 아들을 기다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창피하다고. 버스에서 내리면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뛰다시피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따라왔다. 아버지가 저승에서 기억하는 아들은 아마 뒷모습일 것이다. 이 일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내 마음에 죄의식으로 남았다.

2017년 12월의 어느밤. 그날도 나는 집에 돌아오지 않은 딸을 기다렸다. 몹시 우울했다. 그해에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슬픈 심정으로 겨울을 맞고 있었다. 16년 동안이나 함께 지낸 반려견을 잃었던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칸타, 견종은 말티 즈Maltese였다.

칸타는 내가 귀가할 때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에도 가슴 높이까지 뛰어오르며 반겼다. 그 뜨거운 환영의 이벤트를 평생 동안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거행하였다. 내 무릎에 앉아 잠들기를 원했고, 내가 생각에 사로잡힌 밤마다 곁을 지켰다. 칸타는 나의 아르고스였다.

달 밝던 12월의 그 밤. 현관앞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림자 두 개가 골목을 서성거렸다. 하나는 달빛에, 하나는 가로등에 비친 나의 그림자였다. 길게 드리운 두 그림자는 영락없이 아버지, 어린 날의 내 아버지였다. 그 거대한 아버지가 나를, 내 딸아이를 기다렸다. 딸은 곧 돌아왔다. 달빛 아래 그림자, 그 긴 실루엣,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서.

그일이 있은지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아이들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업이 쌓였기 때문일거라고. 이승의 업이 너무나 커서 내생으로 이월하기 전에 일부라도 청산해야 한다고.

 

 

허진석
시인.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타이프라이터의 죽음으로부터 불법적인 섹스까지』, 산문집 『놀이인간』, 『기자의 독서』 등이 있다. 아시아경제 편집부국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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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당근 2019-02-09 23:51:07
감동적입니다. 깊은 밤, 생각이생각을 물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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