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전남 순천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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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전남 순천 선암사
  • 이광이
  • 승인 2017.11.2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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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 그대, 올라오면서 보았는가?
사진 : 최배문

“선암사는 봄이 제일 아름답지요?” 하고 스님에게 말했더니, “사시사철 언제나 그렇지요.” 한다. 고목에 매화필 때, 가끔 찾아가는 사람과 늘 거기 사는 사람의 차이가 그렇다. 가는 사람은 때가 있지만, 사는 사람은 때가 없다. 사랑과 삶이 그렇고, 추석에 만난 고향 집의 모자母子가 그러했겠다. 맞아도 좋을 만큼, 가을비가 내린다. 산사는 비에 젖어 가을 색이 더 짙다. 은행나무가 손을 뻗듯이, 늙은 기와지붕 위로 노란 가지를 내밀고 있다. 산벚나무는 단풍보다 먼저 빨갛게 물들었다. 불조전 앞에는 금목서가 지고, 은목서가 피었다. 은목서 향기는 앞뜰에 가득하고, 차꽃 향기는 뒤뜰에 가득하다. 구절초, 쑥부쟁이 같은 풀꽃들이 돌담, 무릎 아래 올망졸망 피었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므로, 가지는 잎으로 가는 물길을 끊어 낙엽이 되게 하고, 서둘러 수정을 끝내야 하는 가을꽃은 짙은 향기로 나비를 부른다.

‘바람의 색깔/어지럽게 심어진/뜨락의 가을’

꽃이 바람의 색色이라는 바쇼의 하이쿠는 시간이 멈춘 선암사의 뜰과 같다. 고개를 둘러 어디를 봐도 집과 돌과 꽃과 문과 못이 어우러진 풍경은 느리고 은은하다. 선암사는 곱게 늙은 자연 미인이다. 코가 너무 높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성형미인처럼, 불사라는 이름으로 시멘트 기둥에 나무 색을 칠하고, 머리에 팔작지붕을 얹은 요상한 건물들이 절을 점령하고 있는 시대에, 한 세기 전의 온전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조계종과 태고종의 오랜 분규로 선암사의 관리권이 순천시로 넘어가 있었던 동안, 부서지고 허물어진 곳을 고치는 일들만 허락되고, 대대적인 불사가 이뤄지지 않은 덕분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선암사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전삼무前三無, 뒤쪽에 후삼무後三無해서 여섯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어느 절에나 있는 해탈문과 사천왕문이 없다. 어간이 높게 만들어져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정면 출입구가 없다. 그리고 대웅전 배흘림기둥에 달아놓는 주련이 없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선암사에서 가장 멋진 조선시대 건축물, 원통전 안에 대들보가 없다. 지금도 ‘호남제일선원’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는 달마전 근처에 선방 일곱 채가 있었는데, 해제 결제가 따로 없이 정진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찻물 끓이는 다로茶爐에 불 꺼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없는 것이 많은 반면에 많이 있는 것도 있으니, 그것이 연못이다. 북쪽 차밭에서 내려오면서 보면, 장경각과 원통전 사이에 연못이 하나 있다. 또 삼성각 계단 왼쪽으로 200년 동안 비스듬히 누워 있는 적송 옆에 작은 연못 방지方池가 있다. 조금 아래, 설선당 서쪽으로 정사각형 두 개, 쌍지雙池가 있다. 그 왼쪽 창파당 앞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공양간으로 쓰는 적묵당을 지으면서 메워졌다. 뒷간과 일주문 사이에 있던 연못 두 개는 성보박물관이 들어서면서 하나가 메워졌고, 앞쪽 것 하나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일주문을 벗어나 조금 내려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 중의 하나인 삼인당三印塘이 있다. 연못이 많은 이유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지세 때문이라고 한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 도선 국사 창건(혹은 백제 성왕 7년 아도화상 창건설) 이래 수많은 화재가 일어났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여순항쟁, 한국전쟁 같은 고비 고비마다 소실燒失과 재건再建을 반복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영조 35년 큰 화재를 당한 뒤 재건하여 아예 산사 이름을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로 바꿨는데, 순조 23년 또다시 큰불이 나서,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일주문 앞에 ‘선암사’, 뒤에 ‘해천사’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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