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의 필독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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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행의 필독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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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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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의 선수행

무문관 제9칙 : 대통지승(大通智勝)

'무문관(無門關)' 제9칙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흥양(興陽)의 청양(淸讓) 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대통지승불이 십겁(十劫)을 좌선도량에서 공부했으나 불법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불도를 이루지 못한 때에는 어떠합니까?"하고 묻자 스님 "그 질문이 그럴싸하구나."하고 대답했다. 중이 다시 "이미 여기가 좌선도량이거늘 무엇 때문에 불도를 이루지 못했을까요?"하고 묻자 스님은 "그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니라."라고 대답했다.

이 화두를 잘 살펴보면 『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가장 큰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님)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십겁이라는 사람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과 좌선 도량이라는 공간을 설정해 놓고 있다. 그리고는 좌선 도량에서 무한히 긴 시간을 수행해도 깨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끝으로 성불(成佛)이니 불성불(不成佛)이니 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관념에 깊숙히 빠져있어 대통지승불이나 무한히 긴 시간 및 좌선 도량이라는 공간 등을 머리로 헤아려 묻고 있는 중에게 그 화살을 돌리고 있다.

즉 공간적인 개념인 좌선 도량과 시간적인 개념인 십겁에 집착해 있는 이 중에게 대통지승불이 성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기존의, 상식적인 틀에 얽매어 있는 중의 성불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명문답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지승불이 아니라 물음을 물은 중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과 중 자신이 시공의 주체임을 일깨워 주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깨달았다면 대통지승불이니 십겁이니 좌선 도량이니 하는 군더더기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핏 생각하기에 좌선도량에서 오래 수행하면 모두 깨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 좋은 보기로 세속의 부귀, 권력, 명예를 다 떨쳐버리고 성직자(聖職者)가 된 분들 가운데에도 자리싸움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수행을 잘못하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좌선도량이라는 공간에 얽힌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일화도 있다. 옛날에 남악선사가 제자인 마조 스님이 좌선을 잘하겠다며 고요한 산을 찾아다니며 애쓰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를 찾아가 묻기를 "그대는 좌선을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하고 물었다.

마조 스님 대답하기를 "성불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남악 선사는 아무 말없이 곁에 깨진 기왓장을 주어 가지고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앞에 서서 바위에다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하도 이상해서 "스님! 무엇을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남악 선사 답하기를 "이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마조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스님! 노망나시지 않았습니까? 기왓장을 아무리 곱게 갈아도 그것이 거울이 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남악 선사 말씀하시기를 "이놈아! 나는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아무리 고요한 곳을 찾아서 좌선을 한답시고 한 평생을 앉아도 부처는 결코 못 되리라!"하며 꾸짖었다 한다. 이말에 깨달음을 얻어 마조가 고요한 곳만 찾아다니던 공간적 집착에서 벗어나 뛰어난 선사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공간의 주체인 마조에게 화살을 돌려 문제의 근원을 일깨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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