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의 땅, 피안을 그리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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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의 땅, 피안을 그리워 하는 사람
  • 관리자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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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국토를 찾아서, 영월군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팔당을 지나 두갈래 물길이 나뉜다. 여기서 가평, 춘천, 화천, 양구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북한강이라 부르고 그보다 더 유장하게 여주, 충주, 영월, 정선을 휘돌아 흐르는 줄기를 남한강이라 한다. 백년도 더 이전에 벽안의 영국 노부인 비숍 여사가 한강의 상류를 탐험하려다 험한 육로를 포기하고 결국 뱃길을 선택했을 만큼 서울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 남한강 줄기를 타고 오르는 길은 당시로서는 육로보다 더 빈번한 교통로였다. 하지만 비숍 여사는 이 뱃길마저도 심한 물살에 결국 포기하고 중도에서 탐험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오지가 지금은 영동고속도로와 원주 - 영월간 국도로 승용차로 3시간 30분 정도면 다다를 수 있어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원주에서 제천을 지나 구비구비 산길을 가다보면 산 아래쪽으로 보기만 해도 시원스런 한강이 흐른다. 강은 태고적부터 그렇게 흐르며 숱한 전설과 사연을 실어 나르고 있다. 상류인 정선에서는 민요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는 정선아리랑의 정겨운 가락이 이 강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으며 영월에서는 어린 나이에 숙부에게 폐위당하고 여기까지 귀양을 와서 사사당한 단종에 얽힌 얘기들이 역시 강굽이를 타고 내리며 바위를 할퀴는 한으로 남아 있다. 또 좀더 흘러 내려가 충주의 탄금대에서는 가야금의 명인이라 전해지는 우륵과 임진왜란의 불행한 장수 이립에 관한 사실과 전설이 한데 어우러져 전해지고 있기도 한다. 실로 우리 강토는 기상찬 산도 좋지만 굽이마다에 흥겨운 가락과 깊이 모를 한을 실어 나르는 물도 또 좋은 반야바라밀의 인연터다.

초여름 부슬비에 젖은 영월 초입의 소나기재에는 '충절의 고장 영월'이라는 기념석과 함께 커다란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단종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가는 신하들이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비가 내려 소나기재라고 불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울창한 아름드리 적송이 묵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풍경을 자아내며 이 고장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그 솔밭 사이로 한많은 단종의 능침인 장릉이 숨겨져 있다.

마치 초행인사라도 하듯 규모가 작은 영월읍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오던 길을 되물어 나와 법흥사로 향했다. 읍내에서 제천을 향하다 연당리에서 술샘마을이라는 주천(酒泉) 쪽으로 방향을 틀고, 가던 방향으로 30분을 더 오르면 법흥사가 나온다. 자장 율사께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아온 진신사리를 나라 안의 인연터 다섯 군데에 나누어 봉안하는데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각각 모시고 맨 마지막에 이곳 법흥사에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다섯 군데를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창건 당시의 사찰명은 흥녕사이다. 흥녕사라고 하면 신라말기에 또 한번 우리 불교사에 기록되는 인연터이니 바로 구산 선문 가운데 사자산문이 세워진 곳이다. 사자산문은 징효 대사 절중 스님이 개창주로서 쌍봉사의 창건주인 철감 국사 도윤의 제자다. 이곳에 흥녕선원을 만들어 탁월한 총명으로 뭇 제자들을 교화하고 참선수행케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적멸보궁으로서의 불연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선불교의 수행가풍을 일으킨 구산선문이 중복되어 나타난 인연터는 아마도 이곳에서밖에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뒤 흥녕사는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중건되는 운명을 겪으며 작은 암자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사명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직 사격(寺格)이 정돈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우들 중에 맨 꼭대기에 있는 적멸보궁(강원도 문화재자료 29호)만 근래에 불사한 흔적을 보이며 원래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그 아래 군데 군데 흩어져 있다. 참배차 법당 안에 들어서니 스님 세 분과 여남은 명의 우바새 우바이가 지성으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있었다. 살며시 빠져나와 법당 뒤로 돌아가니 옛날 어떤 스님께서 들어가 수행하던 곳이라고 알려진 토굴이 보인다. 이 토굴 안에는 석관이 남아 있어 이 안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열반하자 그대로 무덤으로 쓴 것 같다고 전한다. 그 입구에는 사리보탑(도지정 유형문화재 73호)이 세워져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보이는 장엄함은 없었다. 그렇다고 설악산 봉정암의 석탑처럼 외외(巍巍)하지도 않다. 한쪽 귀퉁이가 깨어지고 마모가 심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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