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강원 고성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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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강원 고성 건봉사
  • 이광이
  • 승인 2017.08.0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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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하고 성불하고 그런 것 다 살아서 하는 거라.”
사진 : 최배문

‘염소 뿔도 녹는다’는 바야흐로 복중伏中이다. 염천 땡볕에 가을은 개처럼 숨죽이고 엎드려 있어서 ‘복伏’이다. 복은 여름의 꼭대기이고, 장마는 그 꼭대기에서 쏟아진다. 저 볕에 크지 않는 것이 없지만, 저 물에 썩지 않는 것도 없다. 그래서 여름은 무성함과 썩음의 양극이다. 진부령 가는 길에 옥수수는 조조의 백만대군처럼 도열해 있다. 무릎만큼 자란 벼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 보리와 감자를 거둔 땅에는 고구마가 들어갔고, 칡에는 알이 박히고 있다. 들에 색깔 좋은 것이 과일이다. 곡식은 다시 땅으로 박혀야 할 씨알이니 뾰족뾰족하고, 과일은 입으로 들어가야 할 것들이니 둥글둥글하다. 둥글둥글한 것들은 내 밭에서 거뒀어도 다 내 것이 아니다. 여름 유기물은 둘 중 하나다. 나누거나 썩거나. 나누는 마음이 없으면 썩어버린다고, 수박이 ‘쩌~억’ 쪼개지면서 화두를 던진다.

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군인이 걸어온다. 군인의 총구 위에 ‘여기서부터 민통선 지역입니다’라고 쓴 아치가 걸려있다. 남한 최북단의 천년가람, 금강산 건봉사에 가려면 저 S자의 바리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신분을 확인하고, 북으로 2km쯤 더 들어가니 건봉사의 일주문인 불이문이 나온다. 우리나라 4대 사찰이었고, 31본산의 하나였던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는데, 오직 불이문 하나만 불타지 않고 남았다고 한다. 그 문의 돌기둥에는 6·25의 총탄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적송이 우거진 숲을 걸어, 능파교를 건너니, 십바라밀 문양의 석주 뒤로 ‘금강산 건봉사’ 현판이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오고, 대웅전 뒷산 파란 하늘 저 너머가 북녘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 아도 화상이 원각사라 칭하고 창건했다고 전하나, 아도는 150년 전에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니, 뭔가 엉성하다. 고려 말에 도선 국사가 ‘서봉사’라 했고, 1358년 나옹 스님이 선원 강원 염불원을 두루 갖춘 대가람으로 중건하여 건봉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봉사는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유명하다. 1605년 사명 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왜군이 통도사에서 약탈해 간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한 뒤 이듬해 중건했다고 한다. 치아사리는 염불원에 5과를 진열해 신도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고, 나머지 3과는 적멸보궁 사리탑에 안치했다.

내가 건봉사에서 제일 궁금해 했던 것은 염불이다. 『삼국유사』와 건봉사 사적에 따르면, 758년(신라 경덕왕) 발징 스님의 주창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염불결사가 이뤄졌는데, 그것이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다. 장장 1만 일에 이르는 기간을 염불 수행한 끝에 승려 31인이 육신등공肉身騰空하고 이들을 뒷바라지했던 시주 913명이 왕생극락했다는 내용이다. 1만 일이면, 보통 30년이고, 정확히는 27년 4개월이다. 여러 사람이 1만 일 동안 염불수행을 했다는 것인데, 당시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평생이다. 등공은 하늘을 난다는 뜻이다. 도약하여 공중에 날아올라 공격하는 중국무예 우슈의 고난이도 기술인 ‘등공비각騰空飛脚’과 같은 등공이다.

“스님, 염불이 뭡니까?”

저녁공양 뒤에 정전 스님과 차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물었다. 정전 스님은 건봉사로 출가, 대만에 유학하여 정토법문을 공부했으며, 만일염불회 지도법사로 활약하고 있는 염불수행승이다. 

“나무아미타불 하고 소리 내서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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