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이 실천해야 할 생명부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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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 실천해야 할 생명부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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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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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한국화가 윤산(允山) 강행원

"지금도 가끔 출가시절 공부하던 초심학 입문에서 스스로 경책하라는 초발심자경문을 문득문득 떠올립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풀어가는데 있어 올바른 해답을 나 자신 스스로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의 법은 나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은혜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피였음을 항상 큰 복락으로 여깁니다.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의 소용돌이치는 현대문명의 폭류 속에서 별다른 사고없이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그 자체가 가피라면 커다란 가피지요."

전남 무안이 고향인 윤산 강행원 선생은 그림 그리는 일, 글씨(서예) 쓰는 일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일인 양 잘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떼고 한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익힌 서예 솜씨는 훗날 국전에서 입선을 할 정도여서 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이전에는 오히려 서예가로서의 이름이 먼저 알려져 있었다.

타고난 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집에 있는 병풍의 그림을 그대로 그려내기도 했고, 국민학교 4학년 때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 자신이 그림 초상화가 각 교실과 동네 관공서 사무실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셨던 그의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몰래 숨어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 물감과 크레파스 도화지를 구하기 위해 집에서 기르는 닭의 달걀과 깨를 몰래 내다 팔아 야단을 맞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특별히 그림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그림장학생으로 입학을 했고,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의 꿈처럼 미술대학을 진학할 수는 없었다. 가정이 어려운데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대신해 부모님의 역할을 해오신 형님의 뜻대로 법대를 지원했으나 낙방을 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절로 들어갔다. 당시 "절에 들어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오직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사촌 형님(청화 큰스님)이 스님으로 계신 해남 대흥사 진불암으로 갔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불교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승가학과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2학년 때 학생운동으로 중도탈락을 해야만 했다.

대학을 그만 두 그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영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대덕암이라고 하는 암자였다. 그는 그때 비로소 자연과 일체감을 맛보았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삶과 본질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출가인연은 계속 이어지지가 않았다. 군대 제대 후 우연찮게 환속하게 되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인연이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정립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작업실이 있는 자신의 집 2층에는 선방이 마련되어 있다. 매일 새벽 그는 그 곳에서 간경을 하고 참선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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