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스님들(신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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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활약한 우리스님들(신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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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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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19)

 내외에 학덕(學悳)을 떨친 원광(圓光)

 신라 불교사에 있어서 원광법사는 너무나 유명한 고승이다. 그러나 그의 전기(傳記)를 살펴보면 상당한 문제가 있으며, 또 오늘날 그에 관해서 널리 알려진 사실 중에는 잘못된 부분도 없지가 않다. 원광법사의 전기로는 현재 세 가지가 전해져 있다. 하나는 당나라 고승전(唐高僧傳) 권 13에 실려있는 「신라 황륭사 석원광전(新羅 皇隆寺 釋圓光傳)」이며, 또 하나는 동경(東京〉〈慶州〉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가 (貞孝家)에 있었던 고본수이전(古本殊異傳)에 실려있는「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며, 마지막 하나는 김척명(金陟明)이라는 경주 사람이 윤문해서 지은 「원광법사전(圓光法사專)」(행동고회전 제 2에 들어있음)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마지막에 해동고승전에 실려 있는 원광법사전은 항간에 잘못 전해진 이야기까지 합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하여 취하지를 않고, 앞의 두 가지는 모두 함께 수룩하였는데 서로 비교해서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전기를 비교해보면 매우 다른 점이 눈에 띄인다. 서로 다른 점만을 간략하게 옮겨서 견주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전자(唐高僧傳)  쪽에는 속성이 박씨(朴氏)이고, 2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진(陳)나라에서 속학(俗學)을 공부하다가 그 곳에서 출가하였으며, 589년 (진평왕11년)에 수(隋)의 서울(京師)로 갔고  9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있다. 후자(高本殊異傳 )쪽에는 속성이 설씨(薛氏)이고 일찌기 출가하여 (新羅에서)30세가 넘어서 귀신의 도움으로 중국에 갔으며, 11년간 머물어 공부하고 진평왕22년(600)에 귀국하였으며, 84세에 입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이 박씨와 설씨로 전혀 다르며 ,출가한 때 곳이 다르고 중국에 건너간 해와 나이도 다르며, 입적하였을 때의 나이도 다르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동일인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원광이라는 이름과 진평왕 때에 중국에 가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하여 국왕과 신라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다는 점만은 똑같다고 할 것이다

  그를 동일인으로 볼 경우 우선 박씨와 설씨란 두 가지 성 중에 어느쪽이 옳겠느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통일 이전의 신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을 알 수가 없다. 그 성은 통일 이후에 후인들이 원광법사의 전기를 쓸때 당시의 사정에 맞추어 성을 붙인 것으롤 보아야 하므로 성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다. (예  삼국사기에 박종상이 삼국유사에는 김종상으로 . 법흥왕(김씨)의 당질인 이심순을 박씨라한 점등.) 그렇다고 해도 중국으로 건너간 해나 그 나이 또는 사정 및 입적 때의 연세 등이 전혀 다른  점은 아무래도 해석이 곤란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활동한 것이나 귀국해서 활동한 사실들에 관해서는 앞의 경우처럼 그렇게 상반되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국내외 활동에 관해서는 동일인의 사실로 연결시켜 보아도 그리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중국 체재중의 일에 관해서 고본 수이전 (高本殊異傳)에서는, 그가 중국에 11년을 머무는 동안 경율론 삼장을 널리 통하고 아울러 유술(儒術)까지도 공부하였다(전통삼장  강학술)라고만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그에 비해 당고승전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4진평왕게)에는 원광법사가 진평왕11년 (589) 3월에 구법(求法)코자 진 (陳)으로 들어갔다고 있다. 그런데 진나라는 그 해 정월에 이미 수나라에 의해 멸망된 뒤였다. 아마 원광스님이 중국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진나라의 멸망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진나라는 당시 남쪽 중국이었으므로 원광스님은 불교가 성하였던 남조(南朝)를 향해 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도착하여 구법 활동한 지역은 오(吳)나라 부근 지방이었던 것 같으며 , 나중에 호구산 (虎丘山)으로 들어가 수도(修道)에 열중하였다. 그가 오직 공부에만 정진하고 있을 때 마침 산 아래 그의 출강(出講)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는 그 청에 응하지 않았다. 어려운 뱃길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까지 왔던 뜻이 배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도 간청하므로 그도 더 사양하지 못하고 강설(講設)을 승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실론(成實論 )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야경(般若經)까지 강의하였다. 그의 강의와 설법의 성과가 대단하였으므로 , 사방에서 법을 듣고 배움을 구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는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한 직후였으므로, 진나라가 세력을 펴고 있었던 남쪽지방은 매우 혼란하였다. 쫓기던 남병(亂兵)들은 닥치는대로 분탕질을 일삼았다. 그 피해는 산사(山寺)에까지도 미쳤다. 원광법사가 머물고 있던 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병들은 절에 있던 스님들을 모두 묶어 놓고 차례로 목을 베었다. 원광스님도 결박을 당한 채 탑 앞에 끌려나와 죽음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때 그 난병의 우두머리 대장이 동구 밖에 있다가 절에 불이나서 탑이 타는 것을 보고는 주력부대를 휘몰아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다. 대장이 절에 달려와 보니 절에는 화재가 없었고,불에 타는 것으로 보였던 그 탑도 아무 탈이 없었다. 다만 그 탑앞에 어떤 스님 하나가 결박을 당한채 졸병에게 죽음을 당하려는 광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얼른 그 칼을 멈추게 하고는 스님을 풀어주게 하였다. 탑이 불타는 것으로 보였던 것은 바로 원광법사의 그 위기를 구하게 하였는 불가사의 (不可思義)한 법력(法力)의 소치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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