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효봉, 법흥 스님・보성 스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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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효봉, 법흥 스님・보성 스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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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0.0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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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효봉, 법흥 스님・보성 스님 인터뷰
 
 
| 효봉 스님의 마지막 제자, 법흥 스님
송광사 방우산방放牛山房. 효봉 스님의 마지막 제자 법흥 스님이 주석하는 곳이다. 1개월 전 통화를 드릴 때는 병원 입원 중이어서 뵙기 어려웠다. 1931년생이니, 85세이지만 아직도 기억력이 좋다고 하셨다. 스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1959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보성 스님이 효봉 스님의 해인사 조실 시절의 법어를 정리했다면, 법흥 스님은 효봉 스님의 동화사 조실 때의 겨울 한 철 법어를 받아 적어두었다. 또한 효봉 스님이 통영 미래사 토굴에 주석할 때, 그 회상會上의 대중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법흥 스님이다. 
 
- 스님께서는 효봉 스님의 마지막 제자로 출가하셨습니다.
“일타(1929~1999) 스님의 소개장을 들고 대구 동화사로 조실이신 효봉 스님을 찾아갔어. 나를 보시더니 효봉 스님이 얼굴이 중 상想인데 이제까지 속가俗家에 있었느냐, 했어. 효봉 스님은 숙명통宿命通이 있으시거든. 전생을 아시거든. 지금은 행자니까 주지스님 모시고 심부름 잘 하고 있으라고 하셨어. 효봉 스님은 워낙 점잖으시거든. 너그럽고 원만하지. 남하고 다투고 시비한 적이 없어. 남 다투는 것을 보면 웃으시지. 시비是非해서 무슨 소용인가,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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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봉 스님께서 법명을 주셨습니다. 어떤 말씀이 있으셨는지요. 
“계를 받고 스님을 찾아갔지. 효봉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난 기억력이 아주 좋아. 잊지도 않아. 컴퓨터지. 잘 들어봐. 중 됐으면 참선하지 이 길밖에 더 있겠니. 강사가 죽을 때 후회하고 죽는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읽고, 바로 읽어도 생사해탈을 할 수가 없다. 기도하고 주력은 제 욕심 때문에 한다. 중은 화두를 들어야 한다. 내가 공부하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라고 부탁하셨지. 또 이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아 생사해탈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고 신심을 부탁하셨고,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어. 옆에서 구산 스님과 일각 스님이 나를 보고 정진 잘한다고 하셨지.”
 
- 동화사 계실 때 효봉 스님 법문을 스님께서 받아 적으셨다고 들었습니다. 
“1959년도 겨울 한 철 법문을 내가 받아 적었지. 일각 스님께서 받아 적으라고 하셨어. 산중에서 비구니스님 다 내려오고, 강원 학인은 10여 명밖에 없었지. 초하루, 보름 때도 법문 하셨지. 적은 것을 효봉 스님께 보여드리고 다시 고쳤지. 한문은 법정 스님이 김달진 씨에게 보여주어서 해석을 다시 해달라고 했어.”  
 
- 스님과 법정 스님이 동화사 효봉 스님 앞에서 처음 만났죠.
“법정 스님은 나보다 일찍 중이 됐지. 당시 법정 스님은 『선가귀감』을 번역하고 있었어. 법정 스님이 동화사에 왔는데, 그때 처음 봤어. 효봉 스님이 법정이, 법흥이 들어와라, 하셨지. 들어가니, 화두를 어떻게 들고 있느냐, 하셨어. 법정 스님이나 나는 아무 말도 못했지. 법정 스님도 생각이 책에 있었으니까. 그래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하니까, 공부 옳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셨지.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어. 짐승이고, 사람이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욕을 이겨내지 못한다. 파계破戒는 파기破器라. 계행을 파기하는 것은 깨진 그릇과 마찬가지며, 깨진 그릇에 물을 퍼붓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말세라 근기가 약해 대중 운력의 힘으로 스님 노릇 잘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살이 절에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여자하고 단 둘이 있으면 이기지 못한다고.”  
 
- 동화사에서 한 철 나시고, 1960년에 통영 미래사로 가셨습니다.
“그렇지. 3・15 부정 선거 투표한 후에 효봉 스님을 모시고 갔지. 한번은 미래사에서 마을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어. 미래사 땅을 놓고 마을 사람들 100여 명이 찾아와 미래사 대중들에게 행패를 부렸어. 효봉 스님에게도 아주 막무가내였어. 마침 경찰도 4・19혁명 때문에 없었어. 아주 사나왔지. 시간이 지나 경찰도 마을에 오게 되니까, 좀 안정이 되었어. 그래서 미래사 대중들이 마을 사람들 몇몇을 고소한다고 했지. 그때 효봉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마을 사람은 속인俗人이고, 우리는 중인데, 중이 속인을 상대로 재판하면 되겠나. 중생계衆生界는 항상 그렇다, 우리가 져야 한다, 재판을 그만두라, 하셨지. 참 …, 효봉 스님 위대한 것을 거기서 알았어.”
 
- 효봉 스님께서 미래사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식사는 아주 간소하셨지. 찬도 나물하고 김치였지. 스님은 전을 좋아하셨어. 늘 눕지 않으셨어. 효봉 스님은 아랫배가 이렇게 불쑥 나왔어. 구산 스님도 단전이 나왔지. 단전이 나오면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나봐. 피로하지 않다네. 우린 그게 안 돼. 건강하셨을 때는 대식가셨지. 한번은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의 노장이 노스님, 국수 잡수실 때도 화두가 들립니까, 하니, 이 사람, 화두가 뭔가, 하셨다니까. 그럴 정도로 많이 잡수셨지.”  
 
- 효봉 스님은 미래사에 작은 토굴 하나를 지어서 거기서 계셨다고요.
“당신 혼자서 지냈지. 그 토굴에서 보조 스님 사진 하나 모셔 놓고, 거기에 반절하면서 지냈지.”
효봉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할 때 1938년 꿈속에서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법문과 게송 그리고 새로운 법호를 받았다. 효봉학눌曉峰學訥. 그때까지만 해도 은사 스님이 주신 운봉원명雲峰元明이란 법명과 법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효봉 스님으로부터 조계선풍이 진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 뚝밤 맞으면서 효봉 스님 
        법어를 받아 쓴 보성 스님
송광사 방장실. 보성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외부인의 만남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노스님을 위한 인터뷰라는 말을 듣고 어렵게 시간을 내주셨다. 스님의 건강 때문에 인터뷰는 30분 정도 허락됐다. 1928년생. 세속의 나이로 88세. 1945년 효봉 스님의 맏상좌인 구산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효봉 스님은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했다. 때문에 효봉 스님의 생활과 수행력을 자주 곁에서 지켜보았다. 스님은 찾아온 일행에게 손을 내밀며 “더 앞으로 와라. 나이가 들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 스님은 “내가 보고 듣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구업을 짓는다.”며 효봉 스님과의 인연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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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봉 스님께 어떤 화두를 받으셨는지요.
“무無 자, 화두를 받았지. 효봉 스님은 백장 회해(720~814) 스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지.”  
 
-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 스님의 법어가 어느 만큼 남아 있게 된 것은 해인사 시절의 손상좌 보성의 정성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랬지. 다 받아썼다가 (효봉 스님께) 뚝밤도 많이 묵었다.”
 
- 왜 스님께서 법어를 받아쓰게 되셨나요?
“내가 기록하는 것이 재밌어서 그랬지. 스님께 ‘이눔의 자슥아, 아까 법문한 것을 잘 들었다가 나중에 기록할 것이지.’ 하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제. 그렇지만 꾸지람 들어가면서도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중에 우리에게 참고가 되겠지 하고 적은 거지. 한 3년 쓰고 나니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  
 
- 효봉 스님이 해인사에서 대중 법문하실 때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스님이 법문하시면 대중이 대략 150여 명이 되었지. 지방에서 신도들이 많이 모였지.”
 
스님의 말씀처럼, 현재 효봉 스님의 법어의 대부분은 해인사 조실 때인 1948년, 1949년, 1950년에 결제 및 해제 법어와 상당 법어다. 아마 그때 보성 스님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현재 효봉 스님의 법어는 대부분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은 60년이 넘은 세월의 기억을 어렵게 꺼내었다. 기억이 흐릿한 대목은 이야기 자체를 닫았다. 잘못 이야기하면 구업이라고 했다. 효봉 스님을 모실 때 가장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한 가지 들려달라고 청했다. 스님은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가 효봉 스님을 찾아왔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줬다. 황 교수가 동아일보 사설 문제로 박정희 정권에게 쫓겨나(1962년 8월 2일) 효봉 스님을 찾아왔다. 황 교수는 효봉 스님께 어떤 위로를 받고자 했던 것일까? 스님 앞에 단정히 앉아 있자, 스님께서 말문을 열었다. 
 
“오늘 처음 만나 묻겠는데, 그래 현직이 무엇인가요?”
“서울 법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 법사인가요? 그럼 법의 스승(法師)이요? 아니면 법의 종노릇(法事)을 하오?”
“….”
“내가 더 묻지 않겠네. 가서 더 공부하시게.”
 
이후 황산덕 교수는 효봉 스님의 속가 제자가 되어, 평생 효봉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보성 스님은 오늘날 우리가 법의 스승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법의 종노릇하며 살아갈지 고민하며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하셨다.  
- 효봉 스님께서 공양은 어떻게 하셨나요?
“오후불식이지. 평생 오후불식하셨지. 반드시 발우공양하시고, 상공양하지 않으셨지. 발우그릇도 반드시 두 번을 씻으셨지. 내가 밥을 얻어먹지만 반드시 두 번 씻어 먹으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지. 우리가 몸뚱이를 끌고 다니면서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아나, 하셨지.”
 
- 효봉 스님은 언제 주무셨는지요.
“나는 (스님이) 주무시는 것을 못 봤어. 그래서 주로 앉아서 계신 것을 봤지. 돌아가시기 1년 전에는 잠깐 주무시려면 스님께서 깨워달라고 하셨지. 밤에는 절대로 누운 모습을 본 일이 없어. 지독했지. 평안도 분이시지. … 화계사 숭산행원(1927~2004) 스님이 평안도 분이시지. 효봉 스님이 서울만 가면 화계사 행원 스님을 찾아갔지. 행원 스님은 고봉 스님이 스승이지만, 스승처럼 아주 알뜰하게 효봉 스님을 모셨지.”
 
보성 스님이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이야기다. 하루는 신발이 잘못 놓여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어 있었다. 바로 놓아드렸다. 그런데 또 보면 거꾸로 놓여 있었다. 속으로 ‘이 어른이 왼쪽 오른쪽도 분간을 못하시나.’ 하고 다시 신발을 바꿔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하셨다. 
 
“그냥 내가 하는 대로 가만 놔둬라.”
“스님은 오른쪽 왼쪽도 모르세요?”
“내가 그걸 모를 리 있나.”
“그럼 신발을 왜 반대로 놓으세요?”
“다 이유가 있지.”
“무슨 이유요?”
“바로만 신으면 바깥쪽으로만 닳잖아.”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한마디 했다.
“스님, 그러면 제가 가끔씩 박박 문질러 드릴까요?”
“이놈의 자식, 내 신은 내가 알아서 해.” 
하시면서 껄껄 웃었다. 보성 스님은 그렇게 중노릇을 배웠다고 했다.  
 
보성 스님은 사람들이 큰스님을 도인이네, 하면서 저 높이 올려 놓고 신비화해 전설로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우려했다. 그러고는 자신들과 거리가 먼 초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큰스님들도 한 인간으로 육체적인 아픔을 겪고, 그 속에서 바로 자신의 본분사를 지켜나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효봉 스님도 통영 미래사에 계실 때 오줌을 제대로 누지 못해서 병원에서 강제로 빼낸 적이 있다고 했다. 주사약을 써서 피고름이 나오고, 혈색이 돌아오자,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하셨다고 한다. 
 
- 효봉 스님 입적하실 때 바로 옆에서 지켜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표충사 서래각에 모셨지. 기력이 많이 쇠하셨지만 정신은 놓지 않으셨어. 낮에는 거의 눕지 않으셨고.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스님을 모시다 잠시 쉬러 일어났는데, 효봉 스님께서 불러 세우셨어. ‘너 어디 가나? 나도 갈 준비 해야겠다.’ 하셨지.”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오전 10시 경이다. 근대 한국불교의 가장 중요한 선승이 그렇게 육신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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