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도한 금강경(金剛經)
상태바
나를 인도한 금강경(金剛經)
  • 관리자
  • 승인 2007.06.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인생을 결정한 불교서

리 영 자  동국대학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일본 다이쇼오대학에서 [한국천대사상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하버드대학교(동아시아 언어 문화학과)객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있다.

 지금은 거대한 빙하기의 얼음덩어리가 맞부딪치며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시각이다. 흔히들 일컬어 화해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서 이 땅은 남북이 소통되었던 때가 있었다. 1950년의 6월이었다. 동족상잔 비극의 시대, 그 시대란 우리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맛보게 한 시대였다. 전쟁이란 어떤 이름으로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의 악업(惡業)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생명의 탈취와 경제적 빈곤 뿐아니라 전쟁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질서와 권위를 무자비하게 앗아가는 파괴자이다.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이 그 처참한 가난을 가장 어려웠던 경험으로 되살리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이산 가족들의 아픔'을 재현하는 TV에서 함께 경험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전쟁은 무엇보다 우선으로 모든 질서의 파괴자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나에게서 '가부장제적인 제도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이 전쟁의 경험으로 부터이다.

 당시의 모든 남성은 전쟁에 나가 싸우는 용감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기피하며 삶을 영위하는 모습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주 위대하고 존경하던 분들이 하루 아침에 비참한 상황에 처해지는 일들을 수 없이 목격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의 광경만이 아니라, 부역한 사람과 그에 대한 남하했던 사람들의 지탄, 이를 변명하려고 전전긍긍하던 모습들 그들은 모두가 나의 가까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런 소녀시절에 사실 삶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고 느끼기에는 너무 객관적 안목이 무디었다.

 휴전선이 그어질 무렵, 전국에는 '휴전반대 데모'가 폐허가 된 강산을 뒤덮었다. 그 때 나도 여고생이었으므로 소리높이 외치며 시가 행렬에 참여하고 또 때로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시민들 앞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세계 정치정세의 역학관계를 알지 못하던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소리높이 외치며 반대만 하면 남북통일의 길을 틀림없이 트이는 줄 믿고 수업을 전폐하고 매일 휴전반대의 귈기대회에 참여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비원(悲願)에도 아랑곳 없이 국제적인 정치구조는 1953년 휴전을 성립시켰고, 우리들 여학생뿐아니라 모든 학생들은 아직도 파괴된 교실, 아니면 가교사 교실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더 이상 이 땅에는 포성이 들리지않게 되고 비행기의 출격명령도 없어진 평화라는 이름이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휴전선과 북으로부터 내려온 민족 대이동의 전쟁 피난민,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와 산하대지(山下大地)뿐이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