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향해 가슴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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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향해 가슴을 열고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10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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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에 출가한 나는 지금 산승山僧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을 등지고 환속한 것은 아니다. 3년 전, 내가 늘 깃들어 살고 있는 땅끝마을 두륜산을 떠나왔으니 산승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겠고, 조계사가 자리한 수도 서울에 살고 있으니 수도승이라 함이 마땅하겠다. 산승과 수도승은 출가수행자를 분류하는 우리들 세계의 객쩍은 은어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에게 “스님들은 피나게 정진해도 수행의 소득이 없을 수 있으나 우리들 수도승은 굳이 참선하고 경을 읽지 않아도 저절로 도가 높아진다.”고 놀려 먹으며 힘든 도시생활을 스스로 위로한다.

 
| 퇴색한 감성과 여유를 찾기 위해

출가수행자가 산사를 떠나 도심에서 살아가는 일은, 새가 숲을 떠나 낯선 세상에서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온갖 시비와 복잡함이 얽혀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출가할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일구어내야 하는 수도승 생활은 여간 조심에 조심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수도승의 옷을 입은 지도 어느덧 3년을 넘었다. 돌이켜보면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수행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삶의 진행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유약하고 모호한 태도를 극복하며 보다 단단해진 것 같다. 일을 통해서 세속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보듬게 되었다. 사람과 일을 통해서 새로운 눈으로 경전을 보는 힘도 얻었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다. 내면의 빛이 바랜 경향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를 아끼는 이웃들의 말을 빌자면, 감성의 물기가 많이 빠지고 여유의 멋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때로는 사무적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고 한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 맞는 말이다. 매우 죄송한 일이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나의 말과 표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께 진심으로 참회의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퇴색한 감성과 여유를 찾기 위해서 서울에서도 나름 안간힘을 쓴다. 그 중에 하나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 산책하는 일이다. 한밤중, 새벽녘, 저물 무렵을 가리지 않고 산책을 즐긴다. 사람에 걸리지 않는 독신과 독거가 이래서 더없이 좋다.

오늘도 새벽녘에 북촌을 거쳐 삼청공원을 지나 경복궁 돌담길까지 걸었다. 조금은 싸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비록 겉으로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달빛을 밟고 걸어간다. 지상에 내린 달빛에 눈길 주고 마음을 얹으니 나는 분명 하늘의 달빛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길을 가면서도 수시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본다. 그러자니 모든 게 새삼스럽다. ‘어! 서울에도 하늘이 있네. 달이 있네, 나무가 있네, 꽃이 있네. 아하! 정녕 마음을 열고 보니 눈이 열리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니 하늘의 달과 지상의 꽃이 보이네.’ 홀연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한다. 더불어 내 곁에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마음 열고 눈을 주면 세상 만물은 그대로가 나와 함께하는 한 생명 한 호흡이라는 오묘한 이치를 가슴으로 깨닫는다.

달빛을 밟고 가려니 달빛에게 고맙기도 하려니와 미안해지려 하기도 한다. 달 아래서는 잡념과 시비와 번뇌가 절로 사라진다. 달은 그 존재만으로도 힐링이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오늘 새벽 덕스러운 만월보살滿月菩薩님께 시를 공양하였다.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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