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와 슬픔 그리고 사랑과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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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와 슬픔 그리고 사랑과 감동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7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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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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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해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딱딱한 등을 침대에 대고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쳐들자 활 모양의 각질마디로 이어진 불룩한 갈색의 배를 볼 수 있었다. 그 배 위로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이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동체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서 맥없이 허위적거리고 있었다.”
 
 | 삶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
절대적 시작.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소설의 시작을 이렇게 부른다. 인용문은 주인공이 왜, 어떻게 갑충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필연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건의 인과관계 설명을 단절한 채 돌발적인 삶의 특별한 정황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충격과 공포 효과를 극대화한다. 사실, 이 놀라운 시작은 한 인간의 수치와 슬픔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그 수치와 슬픔의 기원은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성격과 관련이 깊다. 고독, 소외, 수난, 왕따, 타자성 등과 같은 사회적 현상들은 20세기 문학의 주요한 관심사였으며 개개인이 직면하는 삶의 부조리한 상황은 사회문화적 혹은 역사적 맥락을 가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변신』은 1912년에 집필하여 1916년에 출판되었다. 약 100년 전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순종적인 직장인이자 헌신적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갑충으로 변하여 모멸과 저주 속에서 처연하게 죽어가는 황당한 줄거리로 구축되지만, 그 행간의 이면에는 20세기를 살아나가는 인간 삶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농축되어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역할 충돌의 모순이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고 있지만, 바로 그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경제 주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창출하는 사람이 오히려 소외되는 ‘역할 충돌’의 내재적 모순이 그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외판원인 동시에 순종적인 직원이어야 한다는 점, 순종하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라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육군 소위 출신의 늠름한 과거와 흉측한 갑충으로 변한 현재를 동시에 살아가는 공간(가족에 의해 자기 방에 갇힌 삶) 역시 이러한 모순성을 극대화시킨다. 그는 마지막까지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치워버려야 할 저것’으로 규정하거나 그의 등을 향해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힌다. 이 모든 양상들을 역할 충돌로 볼 수 있다. 그에게 부여된 이런 지위는 현대인이 직면한 모순과 갈등의 명징한 표식이다.
주인공이 받는 박해와 상처를 예수의 수난 알레고리로 풀이함으로써 기독교의 역사적 맥락을 이 소설에 덧입히는 견해도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박해당하고 배신당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감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 그레고르의 변신이 예수 탄생일 즈음에 시작하여 예수의 부활일인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3월 하순 경에 죽음을 맞는다는 점,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 서 오후 3시 경 숨을 거두는 것과 그레고르가 교회의 탑시계가 3시를 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숨을 거두는 것 사이의 상동성 등등에 주목한다.
나아가 인류 타락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거창한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하면서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그로 인해 점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이 소설의 스토리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심층적인 상징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르의 등에 박힌 사과는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운 기생충(그레고르는 가족을 부양하던 경제 주체로서의 가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받아 연명해가는 기생충으로 전락한다)에 대한 환멸의 표식이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살 속에 박힌 원죄의 기념물’이자 ‘육체의 가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그 아버지에 의한 처벌의 형식을 가진다는 점에서 아버지 야훼로부터 버림받는 아담의 이야기 구조와 닮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장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가족의 일원이 그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아이러니가 이 소설이 제기하는 현대성의 모순이며, 인류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을 현대사회에 효과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 인간소외의 극단적 모습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주인공이 자본주의 성장 과정의 문제점으로 부각된 ‘노동 소외’를 극적 형식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외된 노동자의 전형이며, 직업세계의 위계질서와 굴욕, 그리고 지속적인 감시 속에 노출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가 갑충으로 변한 사실을 제일 처음 목격한 사람도 가족이 아니라 회사의 지배인이지 않은가. 출근 시간이 늦은 주인공을 직접 데리고 가기 위해 온 지배인이야말로 ‘갑’의 감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흉측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주인공은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곧 옷을 입고 견본을 꾸려가지고 출발하겠습니다.”
또한 그는 가족들로부터도 노동의 착취를 당하는 인물로 묘사됨으로써 인간소외의 극단적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는 파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재산을 남겨두었으며, 생계가 어려워지자 금세 다시 은행원으로 취직하여 가부장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아들에 대한 노동착취 구조의 본질을 드러낸다. 나약한 어머니와 성격이 급변하는 여동생조차도 주인공을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데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캐릭터들이다. 특히 그의 여동생은 오빠를 가엾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인물에서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인물로 성격이 급변한다.
“이 이상 더 못 견디겠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직 사정을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저런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것을 없애야 한단 말이에요. 저것을 먹여 살리려고 참고 견디며,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왔어요. 아무도 우리들을 나무랄 사람은 없어요.”
왕명을 어기고 천륜을 지키고자 오빠의 시체를 덮어주는 저 그리스 비극 속의 주인공 안티고네의 위대한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인물이 바로 그레테 잠자인 것이다. 프라하 출신의 철학자 카렐 코식은 이 그레테 잠자를 현대적 인물의 한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문제는 작가가 인간으로서의 바른 길, 이를테면 안티고네의 선택과 같은 형식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고전의 가치에 반하는 ‘반-고전’의 전형적 형식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엄청난 일들이 가족 구조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10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 모멸과 저주로부터 감동과 애정으로
결과적으로, 그레고르의 수치와 슬픔의 이면에는 가족 내에서의 확고한 주체 위치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변신’ 후 가족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가족 담론의 주체로서의 기억’을 유지시키려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체성과 주체의식, 그리고 저주받은 육체 사이의 파괴적 분열이 불러온 현대적 비극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둔중한 울림은 이러한 충격과 비판정신에만 있지 않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가족에 대한 분노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이 없는 턱’의 비애는 갑충으로 변한 주인공이 먹는 음식의 변화와 직결된다. 맛있는 음식을 소리 내며 씹어 먹는 가족이나 하숙생들과 달리 그는 유동식을 홀짝거리며 연명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점차 음식을 거부하게 된다. 점점 말라가는 그레고르와 달리 여동생 그레테는 점점 예뻐진다. 이 두 인물의 극적 대비는 이렇게 감각적인 차원에서 탁월하게 부조된다. 시각이 퇴화하고 미각과 후각이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마지막 청각만이 주인공에게 허용된다. 동생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에 감동하기도 하고 교회의 탑시계 소리를 듣는 것은 몸은 비록 갑충일지라도 정체성만은 인간을 유지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최후의 기품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소설의 마지막 배경은 이렇게 제시된다. “가족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애정을 가지고 명상에 잠겨 있다가 창밖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오랜 어둠의 시간을 지나 창문 밖이 훤히 밝아올 무렵, 비극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무엇을 하였던가. 자기를 모멸하고 저주했던 대상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애정을 가지고 명상에 잠기지 않았는가. 이런 태도에서 싯다르타의 깨침과 가르침이 보이는 것은 비단 필자의 눈에만 그런 것인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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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전략홍보실장과 (사)미당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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