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가볍게 살지 못하는 자의 표정은 늘 검고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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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가볍게 살지 못하는 자의 표정은 늘 검고 서늘하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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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

업業은 으레 죄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모든 게 내 업보”라는 한탄이 그렇고 “업장業障을 씻어야 한다”는 권고가 그렇다. 불교에선 몸과 입이 행하는 폭력, 그리고 폭력의 씨앗이 되는 탐욕과 분노의 억제를 재우친다. 이른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하지만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움직이고 말하고 뜻한 것의 총체다. 어디서 태어나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직장에 다니며 때때로 어딘가를 여행하는 것 등등이 몸의 궤적이라면, 그 무수한 ‘거기’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뜻과 입의 역사다. ‘신구의’ 각자는 흠결이 없으나, 그것들이 이해관계와 결합하면 대번에 사고를 치거나 위험에 빠진다. 모든 생명의 존재양식은 ‘점유’여서, 대개 남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남이 가질 것을 먼저 차지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업을 짓는 일인 셈이다.
 
 
이 세상 모든 출생은, 단출하게 정리하면 부모의 욕심 혹은 성욕 때문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막상 태어나면 물리지를 못하는 게 또한 본능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살아 있으려 한다. 다만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야 하니까 죄도 짓게 되는 것이다. 업이란 것도, 이렇게 약도 없고 답도 없는 생의지生意志의 산물이다. 좀 더 길게 좀 더 멋지게 살고 싶다 보니, 자연스레 치졸해지고 뻔뻔해진다. 5분에 한번 오리발을 내밀고 10분이 멀다 하고 시치미를 떼며, 더 산다. 똥을 싼 뒤에 거적을 덮고 침을 뱉고는 발로 비벼놓은 업의 진흙탕은, 더럽고 어둡고 어지럽다. 특히 삶에 집착할수록 그럴듯한 삶을 희망할수록, 진흙탕의 주인이 되고자 애간장을 태운다. 어두워서 남의 발을 밟고, 어지러워서 뇌물을 쓰며, 더러워서 더 더러워진다.
욱하는 성격에 이성을 잃어, 오랜 세월 감옥에서 썩는 자들이 있다. 순간의 실수로 인해 신물이 나도록 반성하고 참회하는 사람들이다. 업보가 무거워지고 업장이 두터워지는 까닭은, 끔찍한 악행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지저분하게라도 살기 위해서, 너무 많이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한 탓이다. 그러니 업을 줄이려면 가급적 덜 생각하고 덜 말하고 덜 움직이는 게 상책이다. 도인들이 은둔과 침묵과 무심의 일상을 유지하는 이유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돈이 생기고 자리가 나는 법. 더불어 사람과 사람을 겨눈 접선(몸)과 대화(말)와 계산(뜻)이 다양하고 정확할수록, 세속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동시에 꾸미거나 속이거나 으르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훔쳐오긴 어렵다. 남들보다 잘 산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많은 업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인과론因果論에 대한 주입식 교육은 인격을 성숙시키고 사회를 무탈케 한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신이 지은 행위의 가치에 걸맞은 결과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 하여 언행을 조심하고 분수에 충실한 것이 인과론자들의 세상살이다. 업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존중은 얼핏 성선설性善說의 근거로 보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생명의 근원적 불안을 암시하는 정서다. 선량하고 순박하게 살면, 웬만해선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일종의 보상심리다. 하지만 나무가 조용히 있고자 한들 바람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 나무가 존재라면, 바람은 운명이다. 업이 적은 삶은 응당 가난하고 외롭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존재한다는 건 언제 어디서고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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